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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로콜리 Jun 12. 2022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8

항암치료가 끝나갈 즈음 수술 계획을 잡기 위해 암 크기나 상태의 변화를 보기 위한 검사를 받았다. CT 사진을 한참 보던 혈액종양내과 주치의는 처음에 수술로 원발암을 제거했음에도 암이 국소 재발했고, 겨드랑이로 전이되었기 때문에 오른쪽 가슴 전체를 다 절제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 의사는 자기 가슴이 아니라고 너무 쉽고 간단하게 말해버렸다.

건강도, 승진도, 결혼도 다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내려놓을 게 남았다는 것인가? 이제는 주님께 따져야 할 때가 온 것일까? 고비를 넘기면서 어떻게든 버텨왔는데, 결국 오른쪽 가슴까지 잃을지도 모르는 내가 너무 불쌍했다.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는 이 모든 것이 다 당신 탓 같다고 하셨다. 죄책감에 괴로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복잡했다. 너무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가 울면 그대로 무너져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울음이 나오려는 걸 있는 힘껏 꾹 참아냈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우리 둘 다 눈에 힘을 주고 크게 뜨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에 갇힌 것만 같았다. 이 고통이 언제까지 계속되어야 하는 걸까. 언제쯤 끝이 날까. 나는 최악의 상황을 대비하려고 수술 날이 다가올 때까지 매일매일 오른쪽 가슴과의 이별을 연습했다. 이까짓 가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고 나를 다독였다. 이 가슴은 나한테 필요 없는 것이라고 정신무장을 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이 다 어려웠지만, 이 일은 정말 쉽지 않았다.


수술하는 날 아침, 의사가 와서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수술하다가 상황에 따라 오른쪽 유방을 전절제할 수 있으며, 환자는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은 것이라고. 각오하고 수술실에 들어갔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로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엄마는 가슴부터 살피셨나 보다.


“OO야! 가슴 그대로 있다! 걱정하지 마! 하느님, 감사합니다!”

“엄마, 그게 정말이야?”


마취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린 상태였지만 그 말은 똑똑히 들렸다. 다행히 암이 더 퍼져있지는 않아서 예상했던 부분만 절제했다고 들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가슴이 남아있었다!

     

난 내 신체 일부인 가슴이 당연히 내 것인 줄 알았다. 없어진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었다. 그런데 가슴이 아직 남아있다는 사실은 기적이었으며 매우 감사할 일이었다. 당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에게 앞을 볼 수 있는 두 눈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두 팔과 다리가, 예쁜 머리카락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할 일이었다.


❚ 매사에 감사하기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입에서는 ‘일상의 소중함’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직장인들이 일터에 가서 일하고, 사람들이 밖에서 자유롭게 친구들을 만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런 일상.

그동안 우리는 일상의 행복을 느끼고 감사해하며 살고 있었을까? 출퇴근길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짜증이 나고, 직장의 누군가가 이해가 안 가서 화가 나고,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는지 세상은 불공평하게만 느껴지고. 불평불만을 쉽게 늘어놓지는 않았을까? 코로나로 인해 당연한 것들이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게 된 요즘, 그동안 누렸던 일상의 행복을 무시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암 환자가 되고 나니 음식을 엄청나게 가리게 되었다. 이 음식은 암에 좋고, 이 음식은 암에 나쁘고, 이건 되고, 저건 안 되고. 정보는 너무 많은데 의사마다 말하는 것이 다 다르니 불안해서 마음 편히 먹질 못한다.

아무거나 먹을 수 있다는 것도 건강한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아픈 사람들한테는 먹고 자고 싸는 것이 엄청 중요한 일이다. 건강한 사람들한테는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아픈 사람들한테는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다.


아프고 난 덕분에 얻은 깨달음이 있다. 요즘의 사람들처럼 ‘아프기 전의 나는 참 행복했었구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휴직하고 집에만 있다 보니 회사에 출근하던 시절이 그리워질 지경이라 몸 건강히 출근하고 일하는 것이 감사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암으로 인해 체온이 많이 떨어져서 여름에도 추위를 심하게 타게 되었다. 건강했을 때는 냉장고에서 바로 꺼낸 찬물이나 시원한 맥주를 아무렇지도 않게 마셨는데, 그 한 잔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것인지 몰랐다.

특히 내가 아직 살아있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이 생겼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운이 좋았다는 것이다. 결국 나는 그동안 참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상쾌한 공기, 따사로운 햇살, 시원한 바람 등 마주하는 모든 것이 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라는 것을 온전히 깨닫는다. ‘암이 준 선물’이라는 말은 참 아이러니하지만 암은 내게 선물을 가져다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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