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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로콜리 Sep 17. 2022

나는 살고 싶고 사랑도 하고 싶어

#18

병원에서 보낸 크리스마스


암에 걸리고 생애 처음 하는 것들이 생겼다. 크리스마스를 병원에서 보낸 것이 그것이다. 2019년 크리스마스를 암센터에서 보냈다. 그동안은 크리스마스가 마치 내 생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일 년 중 최대한 화려하게 보내는 날이었다. 굳이 한 달 전부터 비싸고 유명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을 예약하거나 친구들과 핫한 클럽에 가서 밤새도록 놀거나. 엄밀히 따지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해야 하는 날인데, 성당에 가기는커녕 놀기 바빴다. 그런데 암으로 인해 내 처지가 얼마나 바뀌었는가! 크리스마스는 내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지만, 오늘은 좀처럼 기분 전환이 되지 않았다.


가슴에는 압박붕대를 칭칭 동여매고 환자복을 입고 하릴없이 병실에 누워있었는데, 늦은 오후 안내방송이 나왔다. 저녁 7시부터 병원 로비에서 인근 교회의 봉사단이 와서 크리스마스 음악회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별걸 다 하는구나…. 나는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엄마는 답답하게 병실에만 있는 것보다 공연이라도 보는 게 나을 것 같다며 나를 강제로 끌고 가셨다. 나는 이런 무료 공연 같은 거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야, 툴툴거리면서도 못 이기는 척 따라갔다.


어색했다. 그런 자리에 그런 차림으로 앉아있는 게 어색하고 불편했다. 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우리를 위해 애써주는 봉사자들의 마음이 전해져 나의 불편함도 곧 사라졌다. 그 사람들이 너무 고마웠다. 어느새 아는 캐럴이 나오면 따라 부르기도 하고, 다 같이 박수를 치고 울다가 웃다가 그렇게 공연을 봤다.

옆자리 암 환자가 내게 눈인사를 보냈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처지를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내가 건강했을 때는 몰랐지만 크리스마스에도 이렇게 아프고 외로운 사람들이 많았겠구나 싶었다. 많은 암 환자들과 함께 보내는 크리스마스. 앞으로 크리스마스를 화려하거나 사치스럽게 보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햄버거가 뭐라고


2019년 겨울, 내 몸에 암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몸에 안 좋다는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매일 브로콜리, 양파, 부추, 마늘, 된장에 잡곡밥만 먹었다. 나는 암 환자니까 당연히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거의 8개월을 속세 음식 다 끊고 그렇게 살았다.


암 환자의 엄청난 일탈은 첫 항암 주사를 맞고 집에 가는 길에 일어났다. 아빠가 뭐 먹고 싶은 것 없냐고 물으셨다. 잠시 망설였지만, 어쩐지 보상심리가 올라왔다. 내 인생에 처음으로 항암 주사까지 맞았는데, 오늘은 먹고 싶은 것 먹어버리자!


“아빠! 나 햄버거가 먹고 싶어!”

“그래, 그래, 오늘 먹고 싶은 햄버거 다 먹자!”


아빠랑 엄마 것까지 내가 먹어보고 싶은 종류로 신중하게 골랐다. 신나게 햄버거를 한 입 베어 무는 순간 예기치 못하게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햄버거는 1년 만에 먹어보는 거였다. 햄버거가 뭐라고. 알 수 없는 서러움이 폭발했다. 이렇게 브로콜리만 먹으면서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파보고 투병 생활도 해본바, 인생은 건강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 삶에 만족하면 그만이다.

투병하는 동안 나는 병이 나아야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병을 치료하는 동안은 내 삶이 잠시 중단된 것이고, 병이 나으면 내 인생이 다시 시작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병하는 동안도 내 삶은 계속되고 있었고, 어렵지만 그 과정에서 충분히 만족을 느낀 때도 있었다. 그때부터 완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스스로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것처럼.


처음 암에 걸린 사실을 알았을 때는 그래도 살고자 엄청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무색하게 암이 재발하고 전이된 것을 알았을 때는 삶을 포기하고 싶었다. 딱히 구체적으로 죽고 싶었던 건 아닌데 그냥 열심히 살고 싶은 힘을 소진한 기분이랄까.

‘살고 싶지 않다’ ‘삶에 미련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앞으로는 이래야지' '이러지 말아야지' 하고 미래를 다짐했다. 앞으로 크리스마스는 성당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미사 드리며 보내고,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는 날이 되고 싶다고 다짐한 것처럼.

나는 분명 살고 싶지 않은데, 매 끼니 꼬박꼬박 브로콜리를 먹고 매일 운동을 했다. 나는 사실 살고 싶었던 걸까? 살기 위해서 브로콜리를 먹지만 살아있기에 햄버거도 먹고 싶다.


그렇다. 나는 아직 살아있다.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살아있었다.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면 다 괜찮다고 했던가. 살아있으니 여기가 끝이 아니다. 무엇보다 힘든 위기의 순간 나와 고통을 함께해준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 내 삶은 나의 것만이 아니다.

나는 암에 걸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치료받고 다시 나아질 것이다. 언제나 재발의 우려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내 삶은 나의 것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나에게 주어진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면서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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