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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로콜리 Sep 04. 2022

죄책감은 우상숭배이다

#16

커버 이미지: 아무 생각 없던 어린 시절 부모님과 함께, 아마도 1989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사를 쫓아내야 한다. 그렇다면 내사를 쫓아내는 좋은 방법이 뭘까? 내사에서 벗어나려고 고민하던 어느 날, 유튜브 알고리즘이 죄책감이 우상숭배인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으로 나를 이끌었다. 이 영상은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강의 중 하나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은 참 신기하지, 우연히 여기서 해답을 찾은 것 같다!


죄책감은 ‘하느님은 사랑’이라는 것을 믿지 못해서 생기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죄책감이 우상숭배인 이유는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심판을 믿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책감은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며, 여기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나는 타인이 나에게 하는 비판이 두려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했다. 내 능력이나 여건과 상관없이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하려고 나를 몰아세웠다. 정작 내 상황은 살피지 못한 채 남의 눈치만 보며 남들에게 나를 맞췄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우울한 삶이었다.

성경에서는 항상 어린아이와 같아지라고 한다. 아직 내사가 자리 잡지 않은 순수한 어린아이들은 부모 앞에서 완벽하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무슨 짓을 하건 부모가 자신을 용서하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기에 행복하고, 그런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자유롭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큰 관심이 없다.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일 때, 더 심각한 문제는 ‘자신도 타인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지 않으면, 나 역시 같은 잘못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타인을 판단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그 사람과 관계가 멀어지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비판적인 이야기를 들으면 두려움과 죄책감, 또는 수치심 등을 느끼게 되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을 판단하는 행위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서로를 심판하면서 어떻게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겠는가?


모든 문제는 바로 ‘나에 대한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생긴다. 전삼용 신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판단을 멈춰야 한다’라고 했다. 내가 판단하니까 타인의 판단도 힘을 얻는 것이다. 내가 심판하니까 당연히 타인도 나를 심판할 것이라 믿게 되는 것이다. 즉, 타인의 심판을 받아들이는 이유는 내가 심판하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

“그들은 다 어디 있느냐? 너의 죄를 묻던 사람은 아무도 없느냐?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요한 8,7)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일화이다. 예수님은 그 누구에게도 죗값을 물으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벌을 주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게 아니라 자유를 주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우리를 벗이라고 불렀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고자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자는 피조물을 만들 때부터 그것이 부족하다는 것을 안다. 부모도 자식이 태어나서 한 번도 죄를 짓지 않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자녀가 죄를 짓든 안 짓든 사랑하고 용서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임종 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 죄를 모두 용서하셨음을 보여주셨다. 우리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용서의 손길을 주신다. 용서가 바로 사랑이다.


나를 심판할 수 있는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나를 심판하지 않으신다. 이미 용서하셨고, 사랑하신다. 내가 죄가 없다면 다른 사람을 심판할 일도 없다. 우리가 남을 단죄하지 않으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신다.

그러니 죄책감을 느끼기보다 이미 용서받았음을 믿고, 하느님의 자비함 속에서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심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유일한 심판자인 하느님께서 나를 용서하셨는데, 신도 아닌 인간을 또 다른 심판자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니 비로소 마음이 편해지며 오랜 죄책감에서 해방되는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동안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며 사느라 속이 곪아가는 줄도 몰라 나는 병들어버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할까?

내사를 나에게서 분리하기 위해 타인의 평가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내 방식대로 한 번 더 생각해보기로 했다. 나를 믿어보기로 했다. ‘과연 그럴까?’ ‘나는 어떤 사람인가?’ 이런 질문을 자주 던지며 나를 알아가고, 나만의 삶의 방식을 찾아가려고 한다. 그리고 나 역시 다른 사람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겠다.


하느님을 유일한 심판자로 믿는 것은 내가 타인을 판단하지 않을 때 드러난다. 나 자신을 비롯하여 다른 사람에 대한 판단을 그만두는 것이 곧 죄를 용서받았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그 증거로 많은 사람과 진실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질 것이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은 자식이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과 원리가 같다. 우리가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 전삼용 ‘죄책감이 우상숭배인 이유: 부모는 자녀를 태어나기 전부터 용서한다’ “전삼용 요셉 신부의 매일 복음 묵상” 2021: 유튜브 https://www.youtube.com/watch?v=XvmK_cChadA&t=18s

** 마셜 B. 로젠버그, 캐서린 한 역 《비폭력대화》 pp.39-40, 한국NVC센터,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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