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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Roland 2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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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재인 Jul 06. 2024

6월 4일 후타코타마가와역

그가 돌연 오피스로 찾아왔다. 


한 달 전에 오키나와 여행이 끝나고 쌤은 SNS에 게시물을 올렸다. 여행 전체 중 나와 단둘이었던 순간들의 사진들만 골라서 “Finally someone to share with.”라는 문장을 적어두었다. 그간 가진 것도 누린 것도 많았지만 그것을 나눌 사람이 없어 얼마나 처절히 외로웠는지가 느껴지는 문구였다. 그 포스트를 보고 있으니 마이클의 말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당시 마이클의 말에 나와는 무관한 일이라 말했지만 사실 책임의 무게를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고 쌤이 직접적으로 이 대화를 시작하기 전까지 내가 어떤 지레짐작으로 말을 꺼낼 수 없었기에 나는 물리적인 거리를 두는 것으로 답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거리를 두는 것을 느꼈는지 쌤은 이길 수 없는 게임을 시작했다. 나를 어떻게 해서든 선동시키려 발악을 했다. 내가 메시지에 답을 하지 않을 때면 그는 내게 보냈던 메시지를 삭제하곤 했다. 가끔은 보내자마자 삭제를 하기도 했다. SNS에는 궁금증을 자아낼 만한 아리송한 문구들을 올렸다. 그는 나로 하여금 어떤 반응이든 자아내고 싶어 보였다. 나의 반응을 통해 본인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했다. 그럴수록 나는 철통 같은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꿈쩍하지 않는 나의 모습에 혼자서 어떤 싸움을 했을지 나는 상상이 된다. 하지만 그런 그의 처절한 몰골은 동정은커녕 굉장한 거부감을 자아냈고 되려 나를 멀리 밀어내는 역효과를 냈다. 그렇기에 그에게서부터의 멀어짐은 책임감이라는 힘겨운 선택도 아니었다. 


그가 오피스로 나를 찾아온 이유는 그가 혼자만의 싸움에서 두 팔 들고 항복했기 때문이다. 끝내 담백하고 솔직하게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고 했을 때 나는 알겠다 했다.

유연근무제로 원래의 퇴근시간보다 훨씬 일찍 회사문을 나서고 있었다. 사람으로 북적이지 않아서 검은 셔츠, 검은 청바지, 검은 부츠를 신은 장발의 그를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로 향하는 발걸음은 약간 주저했다. 분명 오늘 그의 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의 회사 앞으로 와있는 그였다. 그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 그가 대신 시간과 돈을 써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 내게 의미하는 바를. 나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발견하고는 단번에 성큼 다가와 반가운 얼굴로 가벼운 포옹의 인사를 하려 했다. 나는 몸을 뒤로 피하지 못한 채 그에게 안겼다. 나는 그를 거칠게 뿌리쳤다. 그가 제멋대로 나의 오피스에를 찾아온 것도 가벼운 포옹의 인사도, 나는 용납할 수 없다. 

뿌리침은 나의 바운더리를 존중해 달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거절, 그리고 단절로 받아들였다. 나는 쌤이 거절과 단절에 굉장히 취약하다는 것을 안다. 우리 모두 단절과 소외에 굉장히 취약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원숭이만 하더라도 어떤 친밀감으로의 단절은 난소를 없애는 것과 비슷한 정도의 스트레스 호르몬을 분비하게 한다. 하지만 쌤은 이전의 트라우마들 때문에 그 이상으로 단절에 취약하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것을 이해하면서도 나는 그의 그런 행동에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는 하나의 시그널이다. 자신의 것을 지키라고 알려주는 건강한 신호이다. 그렇기에 그의 계속된 침범에 분노를 느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마치 그의 사지를 절단하는 것과 같은 가해력이 된다. 나를 지키려 했을 뿐인 행동이 그를 다치게 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또한 나의 몫이 된다. 그와 나는 맞지 않는 톱니바퀴 같은 것이다. 억지로 돌리다 보면 서로가 마모될 뿐 결코 굴러가지 않는. 하지만 그는 그의 세계에 갇혀 나의 세계가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기에 이런 우리의 역학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연초에 집 앞에 찾아와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것도 친절을 탈을 쓴 채 나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이기적인 침범이라 생각했다. 그가 내방으로 찾아와 욕을 하고 갔다면 나는 오히려 덜 분노했을 것이다. 그의 친절함은 나를 죄책감으로 옥죄어 왔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오자마자 셰어하우스에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했지만 나는 끝내 그에게 새로운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나를 데려다 줌으로써 도시락 혹은 선물을 전달해 줌으로써 내게 영향력을 드러낼 수 없었다. 

“여기가 내 직장이란 것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는데.” 

“Um, my bad.” 나에게서 멀어지며 그는 말했다. 

“왜 여기까지 왔어?”

“너 피곤할까 봐.” 나는 눈을 아래로 깔며 짧은 한숨을 내셨다.

“저녁 먹었어?” 그가 물었다.

“아니. 근데 별로 배 안고프네.” 선을 긋는 것 같은 말에 그는 안절부절못했다.

“마실거나 사서 강 근처 걸을래?” 나는 하는 수 없이 제안했다.

“그래.” 어딘가 다급하게 답했다.


분명히 할 말이 있다고 해서 나를 찾아오기까지 했으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강가 주변 공원에 도착해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나는 마이클 말이 생각나서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루카스랑 원준이 등 네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겠다.”
“그들은 몰라. 나는 알아.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루카스는 뭐라고 하는데?”

“내 상태가 지속가능하지 않을 거래. 결국은 파멸에 이를 거라고.” 나는 그 상태라는 것이 그의 라이프 스타일을 일컫는 거라 짐작하고 싶었다. 나와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은 아닐 거라 이해한 척해야 했다. 

“너 생각은 어떤데.”

“난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 그는 이 말에 유독 힘을 주며 말했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내게 전하고 싶다는 듯이. 나는 되레 두려워 루카스로 대화의 초점을 바꿨다.

“그니까 루카스는 너를 위해 최선을 바라주는 거잖아. 근데 아무리 친해도 그가 무엇이 너의 최선일지 어떻게 알겠어.” 나는 루카스와 쌤과 같은 우정의 파괴적인 결과물을 경험하기도 목격하기도 여러 번이었다. 우정은 종종 위험한 외줄 타기를 한다.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바라주는 것은 상대방이 충분치 않다는 것과 동의어다. 더 나은 것을 바라주는 상대방의 기준에 못 미치는 상처를 나는 안다.

“근데 루카스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나도 언제까지나 이럴 수 없어. 네가 늘 내게 하는 말이잖아. 더 이기적일 필요가 있다고.”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응. 그랬지.”

“나한테 의미 없는 관계들을 좀 정리해야겠어.” 나는 마른침을 다시 한번 삼켰다.

“응.”

“그래서 답해주었으면 좋겠어. 이제는 알아야 할 것 같아. 우리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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