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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달한 대보름 달이었지

오늘은 그녀를 위해 기도하자

by 젤리

매번 가는 마트에 보이지 않던 땅콩, 호두, 각종 건 나물 등이 수북이 쌓인 걸 보면 굳이 달력을 보지 않더라도 정월 대보름이 가까워 짐을 알 수 있다. 언제부터인가 나의 보름은 스쳐 가는 마트의 풍경이 전부다. 다만 한 가지, 사람들이 새해 해맞이를 하며 소원을 기원하듯 난 정월 대보름날 달맞이를 한다. 소박한 달맞이. 베란다에 나가 달을 보며 바람을 기원한다. 새해를 맞이하는 마음 다짐이라고 하는 게 낫겠다. 일 년에 한 번이지만 지인의 무탈도 소원한다.


꼬마 시절 보름날 많이 했던 놀이는 꼬깃꼬깃 찌그러진 깡통에 나무를 넣어 돌리던 쥐불놀이다. 꼬마들은 그 불을 도깨비불이라 했다. 활활 타도록 돌리다 멀리 던지면 불똥이 쏟아진다. 현대판 불꽃놀이다. 요즈음 꼬마들은 세계 불꽃 축제를 보며 자란다.


명절인 정월 대보름에는 많은 풍속과 먹거리가 있다. 겨울에 부족한 영양을 보충한다는 보름 음식은 선조의 지혜다. 그 음식 중 오곡밥과 나물에 대해 잊지 못할 추억이 있다. 지금은 절대 할 수 없는 꼬마들만의 놀이다. 내 고향에서만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곳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아슬아슬 가슴 조이며 했던 꼬마들의 놀이, 노골적으로 훔치는 놀이다. 만우절 날 거짓말하듯. 꼬마들은 남의 집 부엌에 들어가 오곡밥과 나물을 훔친다. 대보름 전날을 개보름이라 부르며 이날 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아무리 추워도 꼬마들은 거사를 진행한다. 동산에 달이 떠오르면 꼬마들은 한둘 나무(동네마다 있던 큰 나무) 밑에 모여 전의를 다진다. 어느 집부터 들어가는지 순서도 짠다. 꼬마가 많이 모이면 집을 분배하고 그렇지 않으면 함께 다닌다. 밤손님으로 갈 집은 대부분 모인 꼬마들 집이다. 서로 그림자를 밟으며 부엌으로 살금살금 들어간다. 시골이라 그런지 대부분 문이 열려있다. 아니면 어른들은 꼬마들 모의를 알고 있었거나. 찬장을 열어 먹고 남은 나물을 들고 간 큰 양푼에 덥석 쏟는다. 꼬마들 거사에 가장 어려운 일은 무쇠솥뚜껑을 여는 거다. 얼마나 무거운지 번쩍 들어 올리기 힘들다. 어쩌다 뚜껑과 솥이 조금만 스쳐도 챙 그르르 달빛같이 투명한 소리가 유난히 크다. 조심조심 솥뚜껑을 열면 먹다 남은 찰밥이, 때로는 고구마가 아직 온기를 품은 채 꼬마 손길을 기다린다. 솥 속에 아무것도 없을 때의 실망감은 어쩌랴. 서너 집 정도 부엌을 들랑거리면 양푼에는 밥이며 나물이 가득하다.


노획물을 가지고 재빠르게 꼬마 중 한 집 뒷방에 모인다. 방바닥에 그대로 양푼을 놓고 싹싹 비벼 먹는다. 웃음과 재잘거림은 양푼 바닥 긁는 소리가 날 때까지 이어진다. 무슨 말을 했을까. 집에서 저녁을 실컷 먹고도 배고픈 꼬마들이다. 현대판 야식이다. 꼬마에게 개보름날의 '오곡밥과 나물 훔치는 것'은 어른이 배려한 놀이였다. 이튿날 어느 집에서도 밥과 나물이 없어졌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달빛이 흐드러진 그 밤, 혼자 집에 가기가 무섭다는 꼬마를 서로 바래다주는 묵직한 우정도 있었다. 우리 집은 조부모께서 오곡밥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엄마는 아무리 보름이라 해도 오곡밥을 짓지 않으셨다. 그 꼬마에게 그날 먹는 오곡밥은 지금의 피자가 아니었겠나.


정월 대보름이 오면 질리지도 않은지 매년 생각나는 추억이다. 이 달달한 추억을 같이한 꼬마들 안부도 궁금하다. 그때를 기억할까.


SNS로 오는 지인들 대보름 카드를 보고, 답하며 건강을 기원한다. 베란다 가득 달빛이 쏟아진다. 추워서 그런지 보름달이 유난히 빛난다. 봄이 올 것 같은 요 며칠 사이의 날씨답지 않게 추워진 대보름날이다. 오늘만큼은 간곡히 건강을 기원하고 싶은 분이 있다. 기원했다. 곧 오는 봄을 향유하실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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