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한 이야기 1. 아픔의 승화
“언제나 나를 괴롭히는 것은 방치된 상처와 아픔이었다. 상처는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고 아픔은 반드시 승화되어야 한다.”
나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플 거 같지 않은 막내딸이 있다. 큰딸과 아들은 아빠가 항상 막내를 너무 편애한다고 불만이 가득하다. 심지어 아내도 내가 막내딸만 좋아해 아이들을 차별한다고, 그래서 오히려 아이 성격을 나쁘게 만들었다고 성화다. 그래도 좋은 건 어쩔 수 없다. 그냥 좋은 걸 어쩌란 말인가? 그런 막내딸에게 어려움이 찾아왔다. 초등학생 때 아무 준비도 없이 미국으로 건너온 아이는 낯선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소심한 성격 탓인지 친구들과도 쉽게 소통하지 못했고 터놓고 말할 친구 하나 없는 학교생활을 점점 거부하기 시작했다. 어린 나이일수록 더 쉽게 외국 생활에 적응할 거라는 부모의 착각이 아이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도 그때 조금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아이의 적응을 돕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
아이의 문제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로 가면서 더욱 심해졌다. 어려워진 수업 내용도 내용이지만 막 사춘기가 시작되는 아이들은 서로에게 좀처럼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막내딸에게 새로운 도전이 찾아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과 떨어져 며칠을 보내야 하는 캠핑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캠핑을 떠나는 날 아침, 여느 아침과는 달리 아이들을 배웅하기 위해 거의 모든 부모가 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자기 반에 해당하는 버스가 한 대씩 도착하자 아이들은 각자 친한 친구들과 짝을 지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자리를 찾아가고 점점 빈자리가 채워져 가는 데도 우리 아이의 옆자리는 채워지지 않았다. 미국 아이들은 특유의 밝은 모습으로 친구들과 인사하고 수다를 떨기도 하며 때때로 바깥에 있는 가족들을 향해 사랑의 표현을 날려댔다. 그런 아이들과는 달리 우리 아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출발시간이 다 되어갈 때까지도 옆자리는 채워지지 않았고 결국 몇 시간이 걸리는 도착지까지 혼자서 갈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다.
바라보고 있던 아내와 나는 마음이 상했지만 애써 웃음을 보였다. 우리를 향해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막내는 결국 참았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소리 내어 울지도 못하고 고개 숙여 애써 감춘 그 서러운 눈물이 더욱 가슴 아팠다. ‘아니 이까짓게 뭐라고 내 가슴이 이렇게 미어져 내리지’ 아이의 아픔이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달되어 오는 듯했다. 눈물을 삼키며 우리는 그렇게 안타까운 이별을 했다.
아이를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메모장을 꺼내어 이렇게 적었다.
“아픔은 반드시 승화되어야 한다. 부모를 떠나는 두려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국땅, 말 한마디 걸어줄 사람 없는 막막함, 누구 하나 의지할 사람 없는 이 현실이 이제 갓 열두 살이 된 아이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겠는가? 그 길에 보이는 눈물은 당연하리라. 하지만 그 아픔과 외로움은 언젠가 이 아이에게 그 무엇보다 큰 자산으로 돌아올 것이다. 아픔은 그 속에 묻혀버리면 트라우마가 되고 슬픔이 된다. 하지만 그것을 이겨낼 때, 비로소 아픔은 소중한 보물이 되고 삶을 밝히는 등불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아픔은 반드시 승화되어야 한다.”
우리는 누구나 아픔을 간직하고 산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없듯이 아프지 않고 어른이 되는 사람도 없다. 문제는 그 아픔을 대하는 우리들의 자세다. 아니, 그 아픔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관점이다. 우리 사회는 아픔을 감추는 데 급급해 왔다. 최근에야 정신과를 다니는 문제가 조금은 자연스러워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정신과는 소위 ‘미친 사람’이 가는 곳이라 여겼다. 그렇게 이 사회는 아픔을 방치하기에만 급급해 왔다. 그리고 그 결과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곪고 곪아 터졌겠는가? 자살률 1위, 노인 자살률 1위, 출생률 최하위, 독서율 최하위 등등 온갖 부끄러운 통계수치가 우리나라의 현주소를 말하고 있지 않은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에게 행복이란 무언가를 이루거나 얻어서 오는 게 아니다. 먼저 치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바쁜 현대인들은 보장되지 않은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를 지옥으로 만드는데 선수들이다. 자신의 상처와 아픔 따위는 돌볼 생각조차 없다. 하지만 어딘가에 숨어 있는 상처와 아픔은 반드시 현실에 나타나게 되어 있다. 지금 괴로움을 겪고 있다면 그건 바로 당신이 그동안 숨겨온 당신의 상처와 아픔 때문이다.
조용히 자신을 바라보자. 그리고 삶에서 내가 가진 상처와 아픔이 무엇인지 느껴보자. 그 상처와 아픔의 치유 없이 행복한 삶은 있을 수 없다. 설령 행복이 있다 하더라도 아주 잠시에 불과할 것이다. 진정한 행복은 내면의 상처와 아픔의 치유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어쩌면 우리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도 아픔을 치유하고 승화하고자 하는 몸부림일 것이다. 실지로 나는 <미국 주재원의 비극>을 글로 쓰면서 나도 모르게 응어리진 나의 아픔을 발견했다. 무려 33화나 되는 아픔을 쏟아 냈다. 그리고 이젠 그 아픔으로부터 어느 정도 놓여났음을 느낀다. 마치 석탄이 오랫동안 열과 압력을 받아 다이아몬드가 되듯, 나의 상처와 아픔이 글이 되어 오히려 나를 빛나게 한다.
이제 더는 하나의 아픔이 또 다른 아픔이 되게 하지 말자. 부모의 상처가 나의 상처가 되게 하지 말고, 나의 아픔이 자녀의 아픔이 되게 하지 말자. 아픔이 우리에게 온 이유는 단순히 아파하라고 온 게 아니다. 바로 그 아픔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라고 온 것이다. 그런 이유로 아픔은 반드시 승화되어야 한다. 당신의 아픔이 당신의 삶에 징검다리가 되고 등불이 될 때까지 아픔은 반드시 승화되어야 한다.
승화된 아픔은 당신의 삶을 보석처럼 빛나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