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가 죽은 지 벌써 강산이 여섯 번이나 변했다. 이제는 그 아련한 기억도 가물거리고.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은 이사를 했다. 아주 작고 아담한 초가집에서 고래 등 같은 기와집으로. 아버지, 어머니, 형, 누나. 우리 식구 모두는 너무 행복하고 좋았다. 이사 가는 것 때문에.
송자 누나, 우리 집의 희생양이다. 위로 언니와 오빠가 중학교에 진학하는 바람에 상급 학교를 포기했고 그 어린 나이에 전화 교환수가 되었다 그 당시는 전화국이 우체국과 같이 있었다. 나와의 나이 차이가 15년 정도니까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니까. 8살이고 누나의 나이가 23살 정말 꽃다운 나이였다.
누나는 약혼했다. 매형은 안동 연초조합(전매청)의 직원이었는데 안동 권씨, 양반 가문에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이었다. 엄마 아버지는 물론이고 우리 집 식구 모두는 너무너무 좋아했다, 매형을. 매형은 안동에서 청송까지 주말마다 누나를 만나기 위해 왔었고. 누나와 데이트엔 언제나 나를 데리고 다녔다, 그 시절에는 다 그랬다, 처녀 총각 둘이 함께 데이트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그렇게 누나의 사랑은 깊어져 갔고 돌아오는 봄, 내가 초등학교 2학년이 되는 해에 결혼식을 올리기로 날을 잡았다. 결혼을 앞둔 가을, 아마도 추석을 막 지난 가을로 기억한다. 누나는 감기를 앓았다. 그것도 아주 심하게 작은 면 단위에 의원이라고는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의원의 원장님이 큰집 사촌 형수의 아버지고 우리 집과는 겹사돈이 되는 셈이었다. 그 원장님께 왕진을 부탁했고 링거를 꽂아 주고 가셨다. 하얀 간호 복을 입은 간호사와 함께. 링거를 꽂고 간 후 30분이 지나지 않아 누나는 발작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다 기억한다. 누나의 머리맡에서 보았으니까 그냥 주사 바늘만 빼면 되는데 우리는 그 누구도 그 생각을 하지 못하고 의사만 찾아다녔다 온 동네를 다 뒤져 의사를 찾았을 때 의사는 만취 상태였고 누나는 숨을 거두는 중이었다. 그렇게 힘들게 찾은 의사는 주사 바늘을 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는 죽었다, 쇼크사였다.
우리 누나는 그렇게 억울하게 죽었다 그 의사의 잘못을 누구나 다 알았지만, 누구도 거기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누나는 불에 태워졌다, 부모 앞에 죽은 자식은 묘지를 만드는 게 아니라고. 안방에서 누나의 시신이 나올 때 엄마가 아닌 아버지가 졸도했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본 아버지의 눈물도 그때였고. 엄마는 처녀로 죽은 누나를 위해 절에서 사십구재를 해주었다, 원혼만이라도 좋은 곳으로 가라고. 일주일에 한 번씩 칠 주 동안 매형은 재에 참석하였다. 마지막 제가 있던 날 스님이 읽으라는 편지를 속으로 읽으면서 매형은 많이도 울었다 어깨를 들썩이면서 서럽게. 인연이 여기까지니 인제 그만 오라는 아버지의 말에도 매형은 한동안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집에 왔다. 그냥 멍하니 앉아 있다가 저녁 먹고 안동으로 갔고. 가끔은 "우리 막둥이 처남하고 놀러나 갈까."라면서 내 손을 잡고 누나와 셋이 함께 거닐던 강둑도 걷고 그랬다. 누나가 죽은 해 구정 때도 매형은 우리 식구들의 선물을 사서 우리 집에 와 내 방에서 나와 같이 자고 그다음 날 안동으로 가고.
그렇게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는 해까지, 누나가 죽고 3년 동안 그 일을 쉬지 않았다. 구정, 추석, 누나가 죽은 날, 아버지 어머니 생일날 그렇게 우리 집에 왔다. 누나가 죽은 지 4년이 되는 해 구정 다음 날. 그날도 어김없이 매형이 왔고 우리 집은 난리가 났다. 아버지는 더는 집안에 발을 들일 수 없다 하셨고. 매형은 대문 앞에 그렇게 울고 앉아 있었다. 그 추운 한겨울. 온몸을 달달 떨면서 나는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어 밤 9시경에 담을 넘어 대문 앞에 가 보았다 매형은 그때까지 그렇게 그 자리에 있었고 나는 그런 매형이 불쌍해서 그 품에 안겨 한없이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나와 매형은 근처 여관으로 가서 잤고 아침에 일어나니 매형은 없었다. 그것이 매형을 본 마지막이다. 그 해부터는 우편물이 왔다. 명절 때와 부모님 생일 때 정말로 질긴 인연이었고 가슴 아픈 인연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해 여름에, 누나가 죽은 지 5년 만에 매형은 예쁜 여자와 함께 우리 집에 왔다. 가을에 결혼할 사람이라 했고 아버지 어머니께 인사를 시키고 갔다. 누나가 죽은 지 6년 만에 매형은 장가를 갔다 그리고 풍문으로 들었다. 과장이 되었다, 아들을 낳았다, 서울로 전근을 갔다, 이렇게.
누나가 죽은 지 20년이 지난 그 어느 해인가 내가 간호사로 근무하던 병원에서 우연히 매형을 만났다. 매형의 아버지가 우리 병동 입원 환자였고 수술을 위해 보호자 동의서를 받았는데 그것을 정리하던 내 눈에 보호자인 매형의 이름이 들어왔다. 권대호. 멀리서 보았는데 매형이 맞았다 매형은 멋있는 중년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악수하고 씁쓸히 웃었다. “누나만 살아 있었다면 진짜 내 매형인데...”누가 들을까 혼자 중얼거렸도 보았다. 서너 번을 만나 술도 마셨고 “우리 막둥이 처남 잘 자랐네.” 내가 그렇게 대견한 모양이다. "처남이 빨리 자라 간호사였더라면 말이야.” “....” 또 누나 생각인 모양이다.
그러고는 잊어버렸다, 매형의 명함이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연락하지 않았다. 나와 매형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노력만 한다면 지금도 매형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참는다. 매형의 가슴속에 잠재워 둔 누나의 기억을 꺼내게 하고 싶지 않아서. 송자 누나, 내 막내 누나다. 지금은 파파 할머니가 되어 있겠지만 내 기억 속의 누나는 언제나 예쁜 처녀다, 볼이 발그레한. 누나가 보고 싶다, 아니 매형이 더 보고 싶어진다.
사진 : 다음 검색창(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이미지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