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과 공평사이
그날 밤, 진우는 서초동 아파트로 돌아왔다. 42평형 아파트는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거실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책장에는 경제학, 정치철학, 정책학 서적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아내 윤지영은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대형 로펌의 변호사인 그녀는 오늘도 밤 10시가 넘어서야 퇴근한 참이었다.
"오늘도 한소희 연구원이랑 싸웠어?"
지영은 남편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싸운 게 아니라 토론을 한 거지."
진우는 넥타이를 풀며 소파에 앉았다.
"그 사람은 왜 항상 모든 것을 구조의 탓으로 돌리는 걸까.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은 무시하고 말이야."
"당신은 왜 항상 노력과 능력만 강조하는데?"
지영이 노트북을 닫으며 물었다.
"당신도 알잖아. 당신 아버지가 대학교수였고, 어머니가 의사였다는 것. 당신이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학원, 수학학원 다녔다는 것. 당신이 MIT 갈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당신 노력 때문이었을까?"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았다. 밤늦게까지 공부했고, 학부 시절 학점 4.0을 유지했고, GRE에서 만점을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자신이 운이 좋았다는 것도 알았다.
"나도 노력했어. 정말 열심히 했다고."
"알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당신 고등학교 동창 중에 당신만큼 똑똑했지만 집안 형편 때문에 대학도 못 간 친구 없었어?"
있었다. 김태수. 진우보다 수학을 더 잘했던 친구. 하지만 고3 겨울, 태수의 아버지가 쓰러지셨고, 태수는 대학 대신 아버지의 작은 치킨집을 물려받았다. 진우는 그 뒤로 태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래도 원칙은 원칙이야. 우리가 규칙을 자의적으로 바꾸기 시작하면, 그게 어디까지 가겠어? 결국 모든 것이 주관적 판단으로 흐르게 되고, 그럼 진짜 불공정한 사회가 되는 거야."
지영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 그 원칙주의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차갑다고 하는 거 알아? 연구원에서도 소문 들었어. 최진우 박사는 숫자만 보고 사람은 안 본다고."
"나는 사람을 봐. 다만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보려고 할 뿐이야."
"공평하게? 아니면 똑같이?"
지영의 질문에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같은 시각, 소희는 마포구 연남동의 작은 빌라 2층 원룸에 있었다. 15평도 안 되는 공간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소중한 보금자리였다.
책상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화면에는 그녀가 3년째 추적하고 있는 프로젝트 파일이 열렸다. '대한민국 청년 불평등 지도'라는 제목.
서울대를 나왔지만, 소희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부산 영도의 작은 식당집 딸이었던 그녀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신문배달을 하며 학비를 벌었다. 장학금과 아르바이트로 대학을 졸업했고, 취업 후 10년이 지난 지금도 전세자금 대출을 갚고 있었다.
그녀가 공평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념 때문이 아니었다. 경험 때문이었다. 그녀는 알았다. 출발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지원군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지를.
노트북 화면에는 그녀가 인터뷰한 청년들의 이야기가 정리되어 있었다.
사례 1. 김민준(25세, 가명), 경기도 안산 출신
"저는 지방대를 나왔어요. 성적은 나쁘지 않았는데, 고3 때 아버지가 산업재해를 당하셔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거든요. 서울로 유학 갈 형편이 안 됐죠. 지방대를 나오니까 서류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많아요. 똑같이 스펙을 쌓아도 서울 주요대 애들이 더 유리하죠. 이게 공정한 건가요? 제가 덜 노력한 건가요?"
사례 2. 박서연(27세, 가명), 서울 강남 출신
"저도 열심히 했어요. 학원을 다녔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부모님이 투자해 주신 거고, 저는 그 기회를 살리려고 노력했어요. 대학에서도 학점 관리 철저히 했고, 토익 990점 받았고, 인턴도 다섯 군데 했어요. 근데 요즘 취업하면 '금수저'라고 손가락질받아요. 제 노력은 인정받지 못하고요. 이게 공평한 건가요?"
소희는 두 사례를 번갈아 보았다. 둘 다 틀린 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둘의 현실은 너무나 달랐다.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머니였다.
"딸, 이번 달은 보내줄 수 있겠니?"
"네, 엄마. 걱정 마세요."
전화를 끊은 소희는 통장을 확인했다. 다음 주 월급이 들어오면 100만 원을 부산으로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의 식당은 코로나 이후 매출이 반토막 났고, 대출 이자만으로도 벅찬 상황이었다.
소희는 다시 보고서를 펼쳤다. 진우 박사의 '공정한' 30% 정책. 그것은 수학적으로는 완벽했다. 하지만 수학이 현실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