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반란(131)

백정치의 절망과 선택

by seungbum lee


배반의 끝에서
밤안개가 깔린 영광 거리 위로 희미한 등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백정치는 무거운 목덜미를 잡힌 채 험상궂은 일본 헌병들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묶인 손목에 피가 통하지 않아 감각이 둔해졌고, 그의 입술에서는 탄식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조병수.
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자신이 믿었던 사내, 함께 정보를 주고받던 동료였다.
하지만 그 조병수가 자신을 팔아넘겨 출세의 발판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너무 늦게야 드러났다.



‘내가… 왜 그놈을 믿었던가…’


조병수의 책상에서 우연히 징용자 명단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본 순간, 백정치는 무릎이 풀릴 것만 같았다.




촌구석에서 소문만 들었던 ‘징용’이란 단어가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일본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어떤 말도 믿어주지 않았다.
모두가 등을 돌렸다.
그 절망 속에서 한 이름이 떠올랐다.


김상 돌.
마을에서 그나마 말을 제일 곧게 하는 사내.
사람의 허물도 품을 줄 아는 사람.
그리고…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
백정치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이를 악물었다.
도망칠 기회를 노려야 했다.
살기 위해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
헌병들이 잠시 따로 서류 정리를 하는 틈.
그는 미친 듯이 튀어 달렸다.




뒤에서 “야마테(멈춰)!” 소리가 들렸지만, 백정치는 멈추지 않았다.
비탈길을 미끄러지고, 돌부리와 나뭇가지를 밟고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때, 그는 드디어 산골 외딴집의 희미한 불빛을 보았다.



김상돌의 집이었다.
문을 두드리는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상돌… 어르신… 제발… 나 좀 도와주시오…”
잠시 뒤, 삐걱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불빛 속에 나타난 김상돌의 얼굴이 놀람과 경계 사이에서 멈춰 있었다.
백정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조병수가… 날 팔아넘겼습니다…
징용에 끌려갈 뻔했소…
아르신 밖에… 믿을 사람이 없소…”




계속 떨리는 백정치의 손을 본 김상 돌은 잠시 깊게 숨을 들이켰다.
곧 그는 말없이 백정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리고 말했다.
“정치는… 이제라도 늦지 않았네.
자네가 잘못한 건 많지만…
살고 싶다면, 진실부터 바로잡아야지.”




백정치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는 알았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는 것을.

keyword
월, 화,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