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치의 탈출
김장독 아래
밤공기가 살을 에는 듯 차갑다. 백정치는 김장독 밑 반공호의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좁고 축축한 공간, 흙냄새와 김치 발효 냄새가 뒤섞인 이곳에서 그는 이미 사흘째 몸을 숨기고 있었다.
머리 위로는 김상 돌의 가족들이 살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 물 긷는 소리, 낮게 속삭이는 대화. 그 일상의 소리들이 백정치에게는 생명줄이었다. 그 소리가 계속되는 한, 자신은 아직 발각되지 않은 것이다.
"정치야."
김장독을 옮기는 소리와 함께 김상 돌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이다. 한오가 난징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어. 법성포에서 배가 뜬다."
백정치의 심장이 요동쳤다. 드디어 이 지옥 같은 은신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인가. 하지만 동시에 더 큰 두려움이 밀려왔다. 영광읍을 빠져나가는 것, 그것은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이걸 가져가거라."
김상 돌이 내민 것은 기름종이에 싼 편지 한 통이었다. 촛불 아래서 보니 정성스럽게 봉한 서찰이었다.
"한오에게 전해줘. 이 편지만 있으면 한오가 너를 도와줄 거야. 내 아들이 비록 멀리 있지만, 우리 집안의 인연은 끊어지지 않았어."
백정치는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받아 가슴 깊숙이 품었다. 종이의 느낌이 심장 박동과 함께 전해졌다.
영광읍의 밤
밤 열한 시. 마을은 통행금지로 적막했다. 간간이 들리는 개 짖는 소리와 바람 소리만이 정적을 깼다.
백정치는 김상 돌이 준 어부 옷으로 갈아입었다. 낡은 무명 적삼과 짚신, 그리고 어부들이 쓰는 낡은 두건. 거울도 없는 반공호에서 그는 손끝으로 자신의 변장을 확인했다.
"정치야, 명심해. 절대 뒤돌아보지 마. 법성포까지는 십 리 길이야. 산길로 가면 검문을 피할 수 있어. 하지만 한 번이라도 의심받으면 끝이야."
김상 돌의 목소리에는 비장함이 묻어났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백정치를 도우고 있었다. 만약 이 일이 발각되면 그의 온 가족이 위험에 처할 것이다.
"상돌 아제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고 뭐고 없어. 우린 같은 마을에서 자란 사이잖아. 살아서 꼭 다시 만나자."
두 사람은 굳게 손을 맞잡았다. 한쪽은 탈출을 시도하는 자, 다른 한쪽은 남아서 흔적을 지워야 하는 자. 운명은 이렇게 갈라졌다.
담장 너머로 몸을 날린 백정치는 골목 그림자에 몸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영광읍의 집들은 어둠 속에 잠들어 있었지만, 곳곳에 배치된 초소의 불빛이 그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했다.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고, 그림자에서 그림자로 이동했다. 한 번은 순찰대의 손전등 불빛이 그가 숨은 담장을 훑고 지나갔다. 백정치는 숨도 쉬지 않고 바위처럼 굳어 있었다.
"이상 없음."
순찰대가 지나간 후에야 그는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읍내를 벗어나 산길로 접어들자 상황은 조금 나아졌다. 하지만 어둠 속 산길은 또 다른 위험이었다. 발을 헛디디면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었고, 짐승들의 움직임에도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달빛에 의지해 걸었다. 십 리 길이 백 리처럼 느껴졌다.
어부가 되다
새벽 네 시. 백정치는 법성포에 도착했다. 포구에는 고깃배들이 즐비하게 정박해 있었고, 어부들이 출항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저기 삼돌이네 배가 보이나?"
김상 돌의 지시를 떠올리며 백정치는 포구를 살폈다. 낡은 목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뱃전에 '삼돌호'라고 희미하게 쓰인 글씨가 보였다.
"누구야?"
배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오십대로 보이는 어부가 그물을 손질하며 백정치를 노려봤다.
"상돌이가 보냈습니다."
그 말에 어부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는 주위를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올라타. 우리는 한 시간 후에 출항한다."
선실로 들어간 백정치는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삼돌이 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을 중국까지 데려다주는 건 목숨을 거는 일이야. 항로 검색도 있고, 일본 순시선도 있어. 들키면 우리 모두 끝장이야."
"알고 있습니다. 평생 은혜를 갚겠습니다."
"은혜고 뭐고 필요 없어. 상돌이의 부탁이니까 하는 거야. 배에 타면 내 지시에 절대복종이야. 알겠어?"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