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골목길의 천사

골목길의 천사

by seungbum lee


서울 강북구 미아동의 낡은 골목길. 새벽 다섯 시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한 노파가 있었다. 등이 굽은 채 낡은 손수레를 끌고 다니는 그녀의 이름은 김순옥, 일흔여덟의 나이에도 매일 폐지를 주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평범한 할머니였다.

"할머니, 또 나오셨어요?"

새벽 배달을 나온 김 사장은 순옥 할머니를 볼 때마다 마음이 짠했다. 한겨울에도 여름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골목길을 지키는 할머니의 모습은 이 동네의 풍경 그 자체였다.

"그럼, 일해야지. 놀고먹을 수는 없잖아."

순옥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주름진 얼굴 가득 피어나는 그 웃음에는 삶의 무게가 묻어났지만, 동시에 꺾이지 않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폐지 줍는 할머니'로만 알았다. 누더기 같은 옷을 입고, 남루한 손수레를 끌며, 쓰레기통을 뒤지는 그저 그런 노인 중 한 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그 작은 몸 안에 얼마나 큰 사랑이 담겨 있는지를.

순옥 할머니의 하루는 새벽 다섯 시에 시작되었다. 좁은 반지하 방에서 눈을 뜨면, 먼저 낡은 가스레인지에 물을 끓였다. 커피 한 잔과 식빵 한 조각이 그녀의 아침 식사였다. 가끔은 동네 슈퍼 사장이 유통기한 임박 제품이라며 건네주는 컵라면이 최고의 호사였다.

"할머니, 이거 가져가세요. 어차피 버릴 거예요."

"아이고, 고맙습니다. 이런 것까지..."

순옥 할머니는 항상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 라면을 반지하 방 한쪽에 소중히 쌓아두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거의 먹지 않았다. 동네 노숙자들에게 나눠주기 위해서였다.

"할머니, 할머니도 드세요."

"나는 괜찮아. 너희들이 더 먹어야지."

그녀가 폐지를 줍기 시작한 것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십 년이 지난 후였다. 평생 공장에서 일하며 두 아들을 키웠던 남편은 진폐증으로 고생하다 쉰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를 치르고 나니 손에 쥔 것은 병원비 빚뿐이었다.

아들 둘은 이미 가정을 꾸려 각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 큰아들은 인천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했고, 작은아들은 경기도 어디선가 택시 운전을 했다. 순옥 할머니는 아들들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도 각자 살기 바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엄마, 우리 집으로 오세요."

"아니다. 나는 여기가 좋아. 너희들 신경 쓰지 말고 너희 가족이나 잘 챙겨."

그렇게 혼자가 된 순옥 할머니는 폐지를 주우며 생계를 이어갔다. 하루 종일 걸어 다녀봐야 만 원에서 이만 원 정도. 그것으로 월세를 내고, 밥을 먹고, 약을 사 먹었다. 남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녀는 불평하지 않았다.

"이만큼이라도 벌 수 있으니 감사하지."

동네 사람들은 순옥 할머니를 좋아했다. 항상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으며, 조용히 자기 일을 하는 그녀는 동네의 안정감 있는 존재였다.

특히 아이들과 학생들에게는 각별했다. 학교 앞 문구점 주인 박 씨는 순옥 할머니가 종종 아이들에게 천 원, 이천 원씩 용돈을 주는 것을 목격했다.

"할머니, 왜 힘들게 버신 돈을 애들한테 주세요?"

"에이, 뭐. 애들 주머니 가벼우면 불쌍하잖아. 나야 먹을 것만 있으면 되는데."

하지만 순옥 할머니에게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있었다.

1985년 봄, 순옥 할머니가 마흔 살이었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그녀는 봉제공장에서 미싱을 돌리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월급만으로는 두 아들을 키우기 빠듯했다. 큰아들은 중학교 2학년, 작은아들은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어느 날, 공장 사장이 그녀를 불렀다.

"순옥 씨, 미안한데 이번 달부터 월급을 못 줄 것 같아요. 경기가 너무 안 좋아서..."

청천벽력이었다. 당장 다음 주면 큰아들 등록금을 내야 했다. 순옥은 무릎을 꿇다시피 하며 사장에게 애원했다.

"사장님, 제발요. 한 달만, 딱 한 달만 밀려도 됩니다. 우리 큰애 학교를..."

"나도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

사장은 고개를 돌렸다. 순옥은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에게 말하자, 남편도 한숨만 푹푹 내쉴 뿐이었다.

"등록금이 얼만데..."

"십이만 원이요."

십이만 원. 그들에게는 하늘의 별 따기 같은 돈이었다.

그날 밤, 순옥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큰아들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다. 담임선생님은 서울대학교도 갈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학교를 그만두게 된다면...

'내가 나서야 해.'

다음 날 새벽, 순옥은 시장에 나갔다. 품팔이라도 하려고. 하지만 중년 여성을 쓸 곳은 많지 않았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한 할머니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줌마, 힘들어 보이네. 뭐 찾아?"

"일자리요. 뭐든 할 수 있어요."

할머니는 순옥을 한참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우리 집에서 가정부 일 할래? 청소하고, 빨래하고, 밥하고. 한 달에 십오만 원 줄게."

십오만 원! 순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요? 제가 해도 되나요?"

"그래. 내일부터 나와."

그렇게 순옥은 강남구 청담동의 대저택에서 일하게 되었다. 집주인은 대기업 회장의 미망인인 송 여사였다.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나 혼자 아들 하나를 키우며 살고 있었다.

송 여사는 냉정하고 까다로운 사람이었다. 청소를 했는데도 먼지를 찾아내고, 음식을 해도 간이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순옥은 참았다. 아들의 등록금을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아줌마, 이게 청소야? 구석에 먼지가 이렇게 많은데?"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순옥은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다시 했다. 손등이 까지고 무릎이 아팠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송 여사의 아들이 집으로 돌아왔다. 스무 살의 준수한 청년이었다. 그는 미국 유학을 갔다가 방학을 맞아 돌아온 것이었다.

"어머니, 다녀왔습니다."

"그래, 잘 왔니. 힘들었지?"

순옥은 부엌에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모자가 껴안는 모습이 따뜻해 보였다. 문득 큰아들 생각이 났다. 요즘 아들 얼굴을 제대로 본 게 언제였던가.

며칠 후, 송 여사의 아들이 갑자기 쓰러졌다. 백혈병이었다. 순옥은 송 여사가 병원 복도에서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의사 선생님, 정말 방법이 없나요?"

"골수 이식을 받으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기증자를 찾기가..."

"돈은 얼마든지 낼게요. 제발 우리 아들만..."

송 여사는 무너졌다. 평생 강단 있게 살았던 그녀도 아들 앞에서는 한없이 약한 어머니일 뿐이었다.

순옥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검사받아볼 수 있을까요?"

"뭐?"

"혹시 제 골수가 맞는지..."

송 여사는 순옥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줌마가 왜...?"

"저도 아들 둘 키우는 엄마입니다. 사모님 마음이 얼마나 아플지..."

검사 결과, 기적적으로 순옥의 골수가 맞았다. 의사들도 놀라워할 정도의 확률이었다.

"정말 기증하시겠습니까? 위험이 따를 수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해주세요."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송 여사의 아들은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송 여사는 순옥의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아줌마... 정말 고맙습니다.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송 여사는 순옥에게 거액의 돈을 주려 했다. 하지만 순옥은 사양했다.

"아닙니다. 저는 월급만 받겠습니다."

"하지만..."

"정말 괜찮습니다. 그 대신..."

순옥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제 큰아들이 공부를 좋아합니다. 혹시 앞으로 공부하는 데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송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당연하지요. 아드님을 제 아들처럼 생각하겠습니다."

그 약속대로, 송 여사는 순옥의 큰아들이 대학에 갈 때까지 학비를 전액 지원했다. 덕분에 큰아들은 명문대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잔인했다. 큰아들은 대학 졸업 직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스물다섯의 젊은 나이였다.

순옥은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토록 힘들게 키운 아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웠던 아들이 한순간에 사라져 버렸다.

"엄마... 미안해요..."

아들의 마지막 말이었다. 병원 응급실에서 순옥의 손을 잡고 했던 그 말.

"미안하긴... 엄마가 미안하지..."

장례를 치르고, 순옥은 송 여사를 찾아갔다.

"사모님,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제가 더 죄송합니다."

송 여사는 순옥을 위로하려 했지만, 순옥은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대신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뭐든지 하겠습니다."

"제 아들이 받았던 그 도움을, 다른 아이들에게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난해도 공부하고 싶은 아이들이 많잖아요."

송 여사는 감동받았다.

"정말... 대단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순옥은 송 여사와 함께 작은 장학 재단을 만들었다. 이름은 '희망씨앗 장학회'. 가난하지만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을 돕는 재단이었다.

순옥은 다시 봉제공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장학회 학생들이 있었다. 송 여사가 정기적으로 학생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순옥 씨, 이번에 장학금 받은 학생 중에 한 명이 의대에 합격했대요."

"정말요? 정말 다행이네요..."

순옥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큰아들이 살아있었다면 의사가 되고 싶어 했었다.

세월이 흘러 2015년, 송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아들도 이미 몇 년 전에 재발한 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였다. 송 여사는 유언장에 희망씨앗 장학회에 전 재산의 절반을 기부한다는 내용을 남겼다.

그리고 놀랍게도, 순옥 할머니를 재단의 공동 이사로 지명했다.

"할머니, 송 여사님이 할머니를 이사로 지명하셨습니다."

변호사의 말에 순옥 할머니는 황당해했다.

"저는 그럴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저는 그냥..."

"송 여사님께서 남기신 편지가 있습니다."

편지를 펼쳐 읽는 순옥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순옥 씨, 평생 고마웠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제 아들은 스무 살에 세상을 떠났을 겁니다. 당신 덕분에 저는 아들과 십오 년을 더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모릅니다. 이제 제 몫까지 당신이 해주세요. 가난한 아이들에게 희망을.'

하지만 순옥 할머니는 이사직을 사양했다.

"저는 배운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습니다. 다른 분이 하시는 게..."

"할머니, 송 여사님의 유언입니다. 그리고..."

변호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이어갔다.

"송 여사님은 할머니야말로 진정으로 아이들을 사랑하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지식이나 경험보다 중요한 게 마음이라고."

결국 순옥 할머니는 이사직을 수락했다. 하지만 여전히 폐지를 주웠다.

"할머니, 이제 폐지 줍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주변 사람들이 물었다. 재단 이사로서 받는 수당만으로도 충분히 살 수 있었다.

"아니야. 내가 벌어야 내 돈이지. 재단 돈은 아이들을 위한 거야."

순옥 할머니는 자신이 받는 이사 수당마저도 재단에 다시 기부했다. 그리고 폐지를 주워 번 돈의 대부분도 조금씩 재단에 넣었다.

"할머니, 할머니 생활은 어떻게 하시려고요?"

"이만큼이면 충분해. 나 혼자 먹고사는 데 얼마나 들겠어."

재단 사무국장인 이 과장은 순옥 할머니를 볼 때마다 고개가 숙여졌다.

"할머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무슨 소리야. 나는 그냥 할 일을 하는 거지."

하지만 순옥 할머니의 건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폐지를 주우며 수십 년을 보낸 탓에 허리와 무릎이 망가졌다. 병원에 가야 했지만, 할머니는 미루기만 했다.

"괜찮아. 조금만 쉬면 나아."

어느 겨울날, 순옥 할머니는 폐지를 주우다 얼음에 미끄러져 넘어졌다. 허리를 다쳐 일어나지 못했다.

"할머니! 괜찮으세요?"

동네 청년이 발견해 병원으로 데려갔다. 진단 결과는 척추 압박골절. 수술이 필요했다.

"할머니, 수술하셔야 합니다."

"비용이 얼마나 들어요?"

"천만 원 정도입니다."

순옥 할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집에 갈래요. 약이나 먹으면서 지내겠습니다."

"할머니, 그러시면 안 됩니다. 평생 누워 지내셔야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순옥 할머니는 막무가내였다. 천만 원이면 학생 두세 명이 일 년을 공부할 수 있는 돈이었다. 그 돈을 자신에게 쓸 수는 없었다.

소식을 들은 재단 직원들이 병원으로 달려왔다.

"할머니, 저희가 수술비를 댈게요."

"안 돼. 그 돈은 너희 돈이 아니잖아. 학생들 돈이야."

"할머니..."

이 과장은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 할머니가 건강하셔야 더 많은 학생들을 도울 수 있잖아요. 제발 수술받으세요."

결국 재단 이사들의 사비로 수술비를 마련했다. 그제야 순옥 할머니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회복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순옥 할머니는 석 달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할머니는 많은 생각을 했다.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까?'

퇴원 후, 순옥 할머니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2024년 가을, 순옥 할머니는 이 과장을 불렀다.

"이 과장, 내 통장 좀 정리해 줄 수 있어?"

"네? 무슨 통장이요?"

"내가 그동안 모아놨던 거."

이 과장이 통장을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 통장 잔액이 사억 원이 넘었다.

"할머니,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순옥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조금씩 모았지. 폐지 주워서 번 돈, 송 여사가 남겨준 돈, 그리고 작은아들이 보내준 돈..."

할머니는 평생 검소하게 살았다. 하루 한 끼나 두 끼로 버티고, 옷은 몇 벌 없었고, 월세 싼 반지하방에서 살았다. 그렇게 오십 년을 살아온 결과였다.

"이걸 다 재단에 기부하려고?"

"그래. 나 죽으면 쓸 데도 없고."

"할머니..."

"그리고 이 과장."

"네, 할머니."

"내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줘. 그것도 다 학생들 돈이야."

2025년 1월, 순옥 할머니는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여든한 살이었다. 폐렴이 악화된 것이 원인이었다.

장례식장에는 뜻밖에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희망씨앗 장학회를 통해 공부한 학생들이었다. 이제는 의사, 변호사, 교사, 공무원이 된 그들이 할머니의 빈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저는 할머니 덕분에 의대를 졸업했습니다."

"저는 할머니 덕분에 고등학교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저는 공부를 포기했을 겁니다."

그들은 할머니를 직접 만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재단 직원들로부터 할머니 이야기를 들었다. 폐지를 주우며 번 돈을 모두 학생들에게 준 할머니. 자신은 굶으면서도 학생들 장학금을 걱정하던 할머니.

이 과장은 조사에서 할머니의 진실을 밝혔다.

"순옥 할머니는 평생 오억 원이 넘는 돈을 우리 재단에 기부하셨습니다. 그 돈으로 지금까지 이천 명이 넘는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폐지 줍는 할머니가 오억 원을?"

"어떻게 그게 가능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었다. 할머니는 평생 아껴 모은 돈을, 자신의 건강과 행복을 포기하면서까지 모은 돈을, 모두 학생들에게 주었다.

뉴스에서 이 이야기가 보도되자, 전국이 떠들썩했다.

"폐지 줍는 할머니, 수억 원 장학금 기부"

"말년에 밝혀진 감동의 미담"

"21세기 한국의 어머니 테레사"

방송사들이 취재 경쟁을 벌였고, 신문들은 1면 톱기사로 다뤘다.

하지만 정작 할머니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없었다.

장례식이 끝난 후, 이 과장은 할머니 방을 정리했다. 좁은 반지하방. 낡은 가구들. 그리고 서랍 속에서 낡은 수첩을 발견했다.

수첩을 펼치자, 할머니의 흔들리는 글씨가 보였다.

'2018년 3월 5일. 오늘 폐지 팔아서 만이천 원 벌었다. 이천 원은 밥값으로 쓰고, 만 원은 재단 통장에 넣었다.'

'2019년 7월 12일. 더위 먹어서 힘들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다. 공부하는 아이들 생각하면 힘이 난다.'

'2020년 11월 20일. 오늘 재단에서 소식 들었다. 우리 장학금 받은 학생이 의사가 됐다고. 내 큰아들도 의사가 되고 싶어 했는데. 정말 기쁘다.'

'2023년 5월 8일. 허리가 너무 아프다. 하지만 병원 갈 돈이 아깝다. 이 돈으로 학생 한 명이 한 달 더 공부할 수 있다.'

이 과장은 수첩을 읽다가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할머니는 평생 자신을 희생하며 학생들을 돕고 있었던 것이다.

수첩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나는 큰아들을 잃었다. 그 아픔은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엄마들은 그 아픔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가난 때문에 공부를 포기하는 아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작지만, 그래도 의미 있다고 믿는다. 내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기를.'

재단은 순옥 할머니의 유지를 받들어 '순옥 장학금'을 신설했다. 할머니가 남긴 돈으로 매년 백 명의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그리고 첫 번째 장학금 수여식 날, 이 과장은 학생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받는 이 장학금은 한 할머니의 평생이 담긴 돈입니다. 할머니는 한겨울에도 폐지를 주웠습니다. 여름 더위에도 골목길을 걸었습니다. 허리가 아파도, 무릎이 아파도, 여러분을 위해 한 푼 두 푼 모았습니다."

학생들은 숙연해졌다.

"할머니는 여러분에게 단 한 가지만 바랐습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언젠가 여러분도 누군가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한 학생이 손을 들었다.

"저희가 할머니께 보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과장은 미소 지었다.

"할머니처럼 살면 됩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작은 것에 감사하고, 절대 포기하지 않는 삶. 그게 할머니가 우리에게 남긴 진짜 유산입니다."

---

그로부터 일 년 후, 희망씨앗 장학회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순옥 할머니의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기부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저도 할머니처럼 작은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매달 만 원씩이라도 기부하겠습니다."

"제 월급의 일 퍼센트를 장학금으로 쓰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였다. 할머니 한 분의 헌신이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다.

순옥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도 특별했다. 그들은 '순옥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매달 한 번씩 봉사활동을 했다. 노인정에서 어르신들을 돕고, 무료 급식소에서 일하고, 가난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다.

"우리가 받은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대학생 김민수는 말했다. 그는 순옥 장학금으로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할머니는 우리에게 돈만 주신 게 아니에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셨죠."

순옥 할머니의 반지하방은 재단에서 매입해 '순옥 기념관'으로 만들었다. 할머니가 쓰시던 손수레, 낡은 옷, 그 수첩이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을 찾는 사람들은 할머니의 삶을 보며 숙연해진다. 그리고 다짐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어야겠다고.

매년 1월, 할머니가 돌아가신 날이면 추모식이 열린다.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 할머니를 기억한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할머니, 잊지 않겠습니다."

순옥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부유한 사람이었다. 돈은 없었지만 사랑이 넘쳤고, 지위는 낮았지만 존경받았다.

그녀가 남긴 것은 돈이 아니다. 희망이다. 사랑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골목길을 걷다가 폐지를 줍는 노인을 보면, 이제 사람들은 다르게 생각한다.

'저분도 누군가의 천사일지 모른다.'

순옥 할머니는 떠났지만, 그녀의 정신은 살아있다.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을 통해, 감동받은 기부자들을 통해, 그리고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을 통해.

어쩌면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순옥 할머니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은 선행을 할 때마다, 누군가를 도와줄 때마다, 우리는 할머니의 유산을 이어가는 것이다.

2025년 연말, 희망씨앗 장학회는 '순옥상'을 제정했다. 남모르게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첫 번째 수상자는 이십 년간 무료 급식소를 운영한 한 목사님이었다.

시상식에서 이 과장은 말했다.

"순옥 할머니는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작은 친절의 누적'이라고. 오늘 상을 받으시는 분들은 모두 그 작은 친절을 실천하신 분들입니다."

그날 밤, 이 과장은 순옥 할머니 기념관을 찾았다. 할머니의 사진 앞에 서서 말했다.

"할머니, 우리 잘하고 있죠? 할머니의 씨앗이 이제 큰 나무가 되었어요. 그 나무 아래서 많은 사람이 쉬어가고 있습니다."

사진 속 할머니는 여전히 환하게 웃고 있었다. 주름진 얼굴 가득한 그 미소는, 세상 모든 아픔을 품어 안을 것 같은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골목길 어딘가에서 할머니의 옛 손수레 끄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달그락, 달그락. 그 소리는 이제 희망의 소리가 되었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울려 퍼지는, 작지만 따뜻한 희망의 소리.


에필로그

순옥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오 년이 흘렀다. 희망씨앗 장학회는 이제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장학 재단이 되었다. 매년 이천 명이 넘는 학생이 장학금을 받고, 수만 명이 기부에 참여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순옥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이 이제는 기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의사가 된 학생, 변호사가 된 학생, 교사가 된 학생들이 자신들이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고 있다.

"할머니께 받은 건 돈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어요."

순옥 장학생 1호였던 박지원 의사는 말한다.

"할머니는 제게 보여주셨어요. 한 사람의 헌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바꿀 수 있는지를."

골목길 어귀에는 작은 동판이 세워져 있다.

'김순옥 할머니를 기억하며
이곳에서 평생 폐지를 주우며
학생들에게 희망을 준 분
2025년 1월 15일
희망씨앗 장학회와 미아동 주민 일동'

겨울바람이 차갑게 불어온다. 하지만 이 골목길은 따뜻하다. 할머니의 사랑이 여전히 이곳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작은 선행을 실천한다. 순옥 할머니의 정신을 이어받아.

세상은 여전히 차갑고, 삶은 여전히 힘들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다. 한 할머니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그 사랑이, 이제 우리 모두의 것이 되었으니까.

골목길의 천사는 떠났지만, 천사의 날갯짓은 계속된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서.



(끝)

keyword
월, 화,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