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들녘에 서면
숨 쉬는 모든 것이 시(詩)가 되는 순간을 맞이합니다.
서정(抒情)
오래전 두고 온
순정한 마음들이
벼 이삭 끝에 매달려
금빛으로 흔들립니다.
푸른 여름날,
뜨겁게 타올랐던 꿈과 고뇌가
묵직한 결실로 고개 숙이는 곳.
아무것도 숨기지 않은 채
맨 얼굴로 누워있는 들판은
삶의 겸허한 이치를 보여줍니다.
운율(韻律)
바람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사각사각, 황금 물결이 일렁입니다.
그것은 땅의 숨결이 부르는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자장가입니다.
저 멀리 기러기 떼가
V자를 그리며 하늘을 가로지를 때,
내 안의 오래된 그리움들도
편지를 들고 먼 길 떠나듯
가슴을 파닥이며 날아오릅니다.
아름다움
논두렁 길가,
코스모스는 가녀린 목으로
마지막 햇살을 받쳐 들고 서 있습니다.
홀로 선 모습마저도
시린 아름다움으로 가득합니다.
벼를 베고 난 후의
텅 빈 고요는
또 다른 충만함입니다.
세상의 모든 소란이 멎고
들려오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목소리.
생각나는 일들
어린 시절,
메뚜기 잡던 신나던 웃음소리,
해 질 녘 어머니가 부르시던
노을빛 잔영(殘影)처럼 따스한 목소리,
그리고
떠나간 이의 흔적을 밟으며
함께 걷던 가슴 시린 사랑의 기억까지.
가을 들녘은
모든 것을 품어주는 대지(大地)의 모성과 같아
내 지난날의 모든 순간들을
황금빛 회상(回想)으로 넉넉히 안아줍니다.
가슴 저 밑바닥까지
서늘한 평화가 스며드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