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년
나는 한국에서 그녀는 일본에서 각자의 삶에 충실했다. 매일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고, 영상통화를 하며 서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모니터를 통해 같은 음악을 듣고, 서로의 아픔을 위로했다. 그녀와 함께할 미래를 꿈꾸며 일본 취업과 비자를 홀로 알아봤다. 문득 그녀의 입에서 나온 ‘I love you’라는 문장을 처음 접한 날은 아프고 설레서 잠을 설쳤다. 매일 그리워했고, 매일 사랑했다. 그리고 매일 괴로웠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런 애매한 관계가 1년이 됐을 무렵이었다. 진척 없는 관계가 서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사귀는 사이가 아님에도 말다툼이 잦아졌다. 정의할 수 없는 우리의 관계는 서로를 지치게 했다.
지칠 대로 지친 이 관계를 정리하기 위함이었을까? 시무룩 해진 우리 관계를 회복하기 위함이었을까? 이도 저도 아닌 관계를 애틋함으로 포장하고 싶었을까? 정체성이 없는 우리 관계의 마침표를 찍기 위 함 일지, 그다음 문장을 찾기 위함이었을지. 혹여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우리 관계를 정리해줄 것 같은 막연함 때문이었을까? 그녀와 나는 여행을 떠나게 됐다.
여행 날짜가 다가오면서 이제는 정말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약 없는 미래에 지친 마음과 그럼에도 그녀와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내 안에 공존했다. 나의 불안감을 잠식시키기 위함이었을까 그녀와 정말 같이 있고 싶어서였을까? 나는 그녀에게 프러포즈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같이 기차에 올라섰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여름 일본의 시골 마을로 향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그녀와 단 둘이 있었다. 교통도 불편하고, 볼거리도 없었지만 행복했다.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논 주변을 사뭇 걸었다. 기차만이 찾아오는 역에 단둘이 앉아 이야기했다. 함께 식사하고, 산책하고, 저녁엔 같이 영화를 봤다.
여행 내내 한 침대에 같이 누웠지만 그 누구도 서로를 원하지 않았다. 서로가 이 여행을 끝으로 각자 길을 갈 것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침대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잠들었다. 소소하지만 행복한 여행을 마무리하며 우리는 서로 헤어질 준비를 했다. 돌아오는 기차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렇게 오사카에 도착했고, 역사(驛舍)에서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고 헤어졌다. 서로 간에 긴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잘 지내란 말이 전부였다. 그녀는 집으로 향했고, 나는 예약해 둔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누워 멍하니 천장만 바라봤다. 점심 무렵의 시간이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가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다. 그저 누워서 지나간 나날을 회상했다. 프러포즈는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움이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배고픔에 이끌려 호텔 앞의 작은 식당으로 향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호텔로 걸어오며 어느새 어둠이 짙어졌음을 깨달았다. 호텔 방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며 지난 1~2년을 곱씹었을 뿐이었는데 몇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방으로 돌아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이 깊어지며 감정이 짙어졌다. 감정이 짙어져 그리움이 그녀일지 사무침일지 모를 때쯤 나는 그녀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를 보면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아니면 무슨 말이 하고 싶은지 아무런 생각이 안 났다. 다만 그녀를 본다면 그저 보기만 한다면 내 안에 있는 모를 감정이 해소될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불렀고, 우리는 근처 놀이터에 있는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그녀의 집 앞 놀이터에서 우리는 마지막으로 관계를 정리했다. 일정한 주기로 안정감 있게 왔다 갔다 하는 그네가 우리의 감정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그동안의 추억, 생각, 감정을 담담하게 서로 고백했다. 지난날 서로를 상처 입혔던 과거를 사과했다. 힘들 때 함께 나눴던 이야기를 회상했다. 이상하고,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이었다. 미련하고, 멍청한 나날이었다. 한 번은 그녀가 너무 밉기도 했다. 그녀도 내가 너무 미웠던 적이 있다 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이 겹겹이 쌓이며 감정의 골을 깊게 만들었지만, 서로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그 순간만큼은 그녀와 나 모두 미소 짓고 있었다. 이제는 정말 안녕이었다. 몇 시간 전 역사에서 나눈 ‘잘 지내’라는 말을 다시 나눴다. 그 잘 지내라는 말에 담긴 진심, 배려, 애정이 서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 섰다. 뒤돌아 보지 않았다. 그녀가 집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내 눈에 담고 싶기보다는 나의 감정에 집중하고 싶었다. 제법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간 내 안에 쌓였던 집착, 짜증, 갈등, 불안, 걱정, 고민 등이 싹 날아가는 것 같았다. 내 안의 번민을 벗어던지는 순간이었다. 스스로 ‘그간 고생 많았다’는 말을 건넸다. 미련했지만 미련을 간직한 체 나아간 나를 마침내 토닥였다. 사랑해서 행복했지만 사랑했기 때문에 괴로웠던 나를 돌봐주고 싶었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보다는 그저 순수하게 누군가를 사랑했던 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사랑받기 위해 노력했던 나를 이제 보살펴 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아파했고, 후회했다. 그렇게 조금씩 나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며 새로운 다짐을 해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