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해 아이들을 맡은 후로 나는 하루하루가 편안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고 있다. 이런 말을 하면 작년 아이들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작년의 아이들은 6학년 특유의 시니컬함과 성숙함으로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아주었기에 나름 편안했지만(외롭기도 했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버라이어티한 사고를 쫒아다니느라 너무나 바빴다. 스페셜한 아이들(내가 근무하는 지역 전체에 소문이 나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 함께하는 연수를 참여하여 내 소속교와 맡은 학년을 밝히면 동정과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을 만나 하루하루 울면서 출근을 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올 해는 내게 선물같은 한 해이다. 이런 아이들을 만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디다 대고 절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도 아마 울며 겨자먹기로 출근하는 동료 선생님들도 계실 것이다. 올 해는 제가 운이 좋았어요. 선생님들. 내년에는 선생님께도 행운이 따르길 바랍니다.교직의 좋은 점은 좋으나 싫으나, 훌륭하나 엉망이나, 한 해의 끝. 1월에 도달하면 새롭게 리셋이 된다는 것이다. 전국 모든 초등학교의 반에, 선생님들이 감당할 수 있을만큼의 금쪽이들만 있길 바란다.
새로운 학년을 올라가 학급을 맡는 일은 무엇이 담겨있는 지 모르는 럭키박스를 열어보는 일에 가깝다. 열어보기 전까지는 그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올 해 내가 받은 럭키박스에는 준이라는 아이가 하나 있다. 준이는 내게 미지의 영역같은 아이이다. 너무나 열심히 수업에 참여해 나에게 감동을 주다가도 체육 시간만 되면 타오르는 승부욕에 우리반 여자애들 두 명은 울리고 교실에 들어온다. 나에게 혼나는 말을 들으면 샐쭉해서 아무말이나 했다가도 또 다음 수업시간이 되면 제일 먼저 책을 펴서 나에게 수업 진도를 알려준다. 준이는 나에게 우리반 최고의 모범생이기도 하고, 여자애들을 제일 처음으로 놀리고 괴롭히는 장난꾸러기 이기도 하다. 멀쩡한 녀석이 대체 왜 그러는지 준이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아마 자신 조차도 그 이유를 잘 모를 것이다. 성장과 함께 흐르는 사춘기 호르몬이 여자 아이들에게 장난을 치라고 지시를 내리는 것일까?
한 해 가까이를 보내며 내가 발견한 포인트들은 다음과 같다.
관찰포인트 1. 준이는 아이같이 웃는다. 이는 씨익 입꼬리를 늘리고 웃는 웃음도, 가볍게 짓는 미소도 아니다. 치아 전체를 다 드러내고 눈까지 힘껏 휘어져 말그대로 하하하 웃는 웃음을 말한다. 나는 이런 지누의 웃음을 좋아한다. 시원하고 맑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지누는 도시 지역의 아이 답지않게 시커먼 피부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지누가 매일매일 성실하게 운동장에서 공을 차기 때문이다. 정말 씩씩한 녀석이다. 지누가 힘차게 웃을때면 시골의 건강한 햇빛을 받고 무럭무럭 자라나는 소년 같아 보기가 좋다.
관찰포인트 2. 아이답게 웃는 준이는 단짝친구가 있는데 이 관계성이 조금 희안하다. 준이의 단짝은 준이와 이름이 비슷한 우리반 또 다른 준이인데, 이 준이는 내가 인정한 우리반 유니콘이다. 나에게 인정받는 유니콘 준이가 부러운건지 뭔지 유니콘 준이의 일탈행동이 보이면 준이는 제일 먼저 내게 달려와 그 사실을 고자질한다. 그리고는 유니콘에게 어떤 벌칙을 내릴 것인지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본다. 종례 후 청소가 우리반에서 가장 극악한 벌칙인데 유니콘에게 청소를 시켜야 하지 않냐며 나를 채근한다. 그리고 놀 때는 다시 유니콘 준이와 가깝게 어울린다. 유니콘도 자신을 밀고 한 자신의 단짝과 거리낌없이 잘 어울린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단짝친구면 보통 잘 못을 해도 숨겨주고 모른 척 하는 것이 보통 아닌가? 나 때와는 또 시절이 변했으니 친구 관계의 트렌드도 달라졌나보다.
관찰포인트 3. 준이는 여자 아이들에게 짖궃은 장난을 잘 친다. 1학기 때에는 사이만 좋았던 우리반이 아이들이 조금씩 성장하고 고학년에 가까워지며 2학기에는 남녀갈등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어린이들은 사회상을 반영한다더니, 우리반에도 젠더이슈가 생긴건가 싶다.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 두 무리로 나눠 서로의 잘 못을 고발하고 열심히도 싸워댄다. 맨날 붙여두면 싸움이 나기 때문에 교실을 절 반으로 나눠 한 쪽에는 여자 친구들, 반대 편에는 남자 친구들로 앉혀두었다. 그래도 하루종일 자신에 자리에만 앉혀 두다가 집에 돌려보낼 순 없기 때문에 아이들은 서로 섞이고 또 다시 갈등은 발생한다. 골치 아픈 일이다.
그래도 준이는 괜찮은 녀석이기에, 이 시기만 조금 지나면 누구보다 젠틀하고 바른 그런 사람으로 성장하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빨리 좀 커라 이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