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제자로부터 온 카톡
어제는 나의 생일이었다. 내가 주인공이 되는 일년의 하루뿐인 즐거운 날인데, 친한 동기의 결혼식과 날짜가 겹쳤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학교에 출근하던 스물 다섯이 엊그제같은데, 동기가 결혼을 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내 생일은 매년 돌아오지만, 동기의 결혼식은 평생 한 번 뿐일 것이므로 동기에게 밥과 커피를 얻어먹은 기억을 떠올리며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이상할 정도로 따뜻했던 날씨가 하루만에 이상할 정도로 추워졌다. 눈발까지 날리는 모습이 맞아, 이게 겨울이지 싶었다. 요며칠 겨울답지 않게 날씨가 따뜻해 우리반에는 반팔을 입고 돌아다니는 아이까지 생겼다. 모든건 저 다워야 한다. 여름은 여름답게, 겨울은 겨울답게.
결혼식장은 요즘 이 지역에서 인기가 많다는 곳이었다. 생화장식으로 유명한 곳이었는데 나도 근 몇 년 안으로 결혼을 할 생각이 있었기에 동기의 결혼을 축하하는 참에 식장을 한번 구경해보고도 싶었다. 드레스 차림으로 하객들을 맞이하는 동기와 인사를 나눈 뒤 그녀의 결혼식을 축하했다. 잘 살아라, 앞으로 인생의 짝이 생긴 동기가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나저나 요즘에 결혼하는 사람이 없다, 저출산이다 하지만 결혼식장 분위기는 다른 것 같았다. 하루에 결혼하는 커플이 총 8쌍이었다. 지방이라 사람 수가 적은 것을 감안하면 많은 숫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식장의 장점은 생화장식을 한다는 것과 한 타임에 한쌍에 커플이 결혼한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때문인지 12시, 1시, 2시…8시까지 결혼 일정이 빼곡히도 차있었다. 마주치는 하객들이 내가 간 결혼식의 하객인지 아니면 이전 결혼식의 하객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화룡정점은 결혼식의 마지막 사진을 찍고 나가는 참에 관계자가 마이크를 통해 하는 말이었다.
‘리허설 시작합니다. 축가 리허설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빠른 한국에 참 잘 어울리는 결혼식 모습이었다. 다음 식의 축가를 맡은 신랑과 신부 중 누구의 친구인지 모르는 이가 마이크를 잡고 몇 분 뒤 부를 노래를 연습하고 있었다. 아직 이전 결혼식의 하객들이 식장을 다 빠져나가기도 전 이었다. 이런 한시간짜리 결혼식을 위해 1500만원 정도를 내쳐야한다니. 누구를 결혼식에 초대할 지 고심하고 드레스를 고르고 또 드레스에 맞게 살을 빼고… 결혼식을 올리지 않고 결혼하는 법도 생각해봐야겠다 싶었다. 같이 동반한 남자친구와 예식장 사업이 돈이 좀 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며 결혼식장을 나섰다.
내 생일이라며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준 남자친구 덕분에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 쏟아질듯이 가득한 아름다운 꽃다발을 받고 귀여운 케익에 초를 부르고 이번 생일 기념으로 비싼 가방도 선물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생일을 거의 챙기지 않고 지나가서 이런 보살핌을 받는 것이 어색하지만 행복하다. 남자친구에 생일에는 어떤 것으로 답례를 할 지 고민이다.
생일 기념 오마카세를 먹고 재즈바로 향했다. 토요일 저녁에는 사장님이 부른 밴드의 공연을 들을 수 있다. 소박한 월급을 이리저리 팡팡 쓴 하루이지만, 생일은 일년에 하루밖에는 돌아오지 않으니까 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나이가 먹으면서 스스로를 다그치기 보다는 껴안아주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 하루 잘 놀았다! 하며 잠자리에 들려는데 카톡 하고 폰이 울린다. 스마트폰을 확인해보니 내가 ‘???’ 라고 저장해둔 이로부터 온 카톡이었다. 예전에 이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모르는 번호라 ???로 저장해두고 전화는 받지 않았다.
카톡사진을 확인해보니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많이 지나 훌쩍 자랐지만 기억 속에 있는 얼굴이었다. 현이는 내가 기간제 교사로 근무했을 당시 만난 학생이었다. 지금도 어리고 미숙하지만 정말 어리고 미숙함의 절정이었던 내가 만났던 첫 제자였다.
첫 기간제를 했던 학교는 외지고 사람이 많이 없는 동네에 있는 곳 이었다. 어릴때는 정말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서 처음 기간제 할 학교를 골랐을 때 네이버 지도를 켜놓고 가장 월세가 싼 집을 골랐다. 그리고 후에 근무할 학교를 정했다. 단지 살 집의 월세가 저렴했기 때문에 그 동네를 택한 것이다. 왜 가격이 저렴한지는 생각해보지 않고서 내린 결정이었다. 3룸에 깨끗하게 리모델링된 아파트 월세가 17만원이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정말 매력적인 가격인데 일을 막 시작해 주머니가 텅 비어있던 내게는 동앗줄처럼 느껴졌다. 그 곳은 사람이 없고 가게들도 적어 밤이 되어 배달의 민족을 켜도 주문할 수 있는 곳이 아무데도 없었다. 덕분에 입은 심심했지만 살은 많이 뺄 수 있었다. 또 식비를 아껴 달마다 100만원씩 차곡차곡 모을 수도 있었다. 24살을 심심하게 보내긴 했지만 얻은 것도 많다.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기 마련이다.
동네를 산책해보면 유달리 술집와 유흥업소가 많았던 동네였다. 학교의 나이든 선생님께서는 이 동네가 공단에 근무하는 사람들이 유흥업소를 가기 위해 자주 찾았던 동네라고 했다. 그래서일까, 그 동네에서는 쓸쓸하고 삭막한 느낌이 났다. 하지만 학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동네와는 달리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처음 5학년 아이들을 맡게 되었을 때가 기억이 난다. 학급수가 17명밖에 안되는 반이었다. 처음 들어가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질문을 받을 때 반에서 키가 가장 큰 여자아이가 내게 물었다. 그 아이가 현이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올 해가 처음으로 학교에서 일하는 거에요?”
“응 맞아~”
“우와~ 우리가 선생님의 첫 제자인거네요?! 기뻐요~”
너무나 다정한 말이었다. 처음 학급을 맡아 경험도 없고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줘야하는지도 모르는 초임 교사에게는 무척 다정했다. 아이들을 훨훨 풀어놓다 옆반 선생님에게 한 소리 듣는 날도 있었다. 그런 다음날에는 뭐만 해도 불같이 화를 냈다. 내 스스로의 선이 없기 때문이었다. 교육관과 경험의 부재로 왔다갔다 혼란스러운 담임 선생님 밑에서 함께 혼란스러웠을 아이들이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따뜻하고 사랑스럽게 나를 대해줬다. 교육과정이고 학급경영이고 임용고시 공부만 하다와 머릿속이 뒤죽박죽 했지만 나를 사랑해줬다.
첫 아이들로 그런 아이들을 만난 것은 지금 생각해봐도 감사하다. 그런데 그 중 현이가 연락을 해주다니, 고마운 일이다.
나의 첫 제자는 생일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잘 지내시냐고 물었다. 단번에 이름을 알아보는 내게 알아봐주셔서 고맙다는 말도 해줬다. 현이는 나의 기간제 근무 마지막날, 자신이 말을 잘 들으면 선생님을 더 볼 수 있냐고 물어보며 눈물을 흘려줬던 제자였다. 한해씩 쌓여가는 교직경력이지만, 나와의 헤어짐을 아쉬워해준 학생은 많지 않았다. 나에게 그런 기억을 준 현이 네가 더 나에게 감사한 사람이야.
현이는 겉보기에는 강하고 터프해보였지만 속은 여린 아이였다. 자주 다투던 부모님 밑에서 눈물짓던 현이의 일기장을 보면 나는 마음이 아팠다. 조금의 위로라도 될까 꼬박꼬박 적었던 나의 위로가 현이의 마음에 와닿았을까. 다만 몇 년이 지난 후에도 내게 안부 연락을 보내주는 걸 보니, 내가 그 아이에게 그렇게 나쁜 교사는 아니었나보다. 오랜만에 떠오른 기억과 추억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현이와 인사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