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 흉내 내냐고? 아니다. 진짜 카페인이 필요해서다. 한국 같았으면 무슨 애가 커피를 마시냐고 할 수 도 있겠지만 캐나다에서는 상대적으로 커피를 조금 일찍 접하는 거 같다.
카페라는 장소는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지만 야근으로 피로에 절어있는 직장인, 시험공부에 알바까지 하는 고등학생, 대학생들의 카페인 충전소다. 저마다 단골 커피집은 하나씩 다 있으며 개인 텀블러에 담아 가는 게 많이 익숙한 문화다.
캐나다 대도시의 커피숍은 커피와 카페인 충전이라는 목적에 더 충실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커피숍은 이르면 새벽 5시, 보통 아침 6시가 되면 영업을 시작한다. 물론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경우도 많지만 다른 음료가 아닌 커피 그 자체는 매우 저렴해서 큰 부담은 없다.
음악학원은 큰 길가보다 살짝 아래에 위치한 곳이었다. 여러 학원과 먹자골목이 뒤섞인 어수선한 동네였다.
2008년도의 이 동네는 커피숍이 거의 없었고 어디 단골 삼을 만한 커피숍이 있는지 동네 탐방을 했다.
역시 주변에 보이는 건 학원, 술집, 횟집, 노래방, 치킨집, 원룸, 식당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참을 돌아다닌 후 간판 없는(있긴 있는데 너무 작아서 잘 안 보였다) 커피숍 비슷한 게 생긴 곳이 보였다.
들어가 보니 아주 아담한, 전체적으로 다 나무로 된 인테리어에 밝지 않지만 그리 어둡지도 않은 따스한 전구색 조명으로 된 곳이었다. 작은 테이블 네 개가 보였고 아기자기 한 소품들도 눈에 들어왔다. 왠지 분위기가 '우리는 단골손님만 오는 곳이랍니다'의 느낌을 갖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뭐 드릴까요?"
인상이 매우 좋으신 바리스타 아주머니가 반겨주었다.
난 어느 커피숍이든 처음엔 하우스 블렌드나 아메리카노를 마셔본다. (원래 마시는 것도 이뿐이지만) 커피를 잘 알거나 하진 않는다. 커피를 오래 마셔 온 것 치고 까탈스럽지도 않다. 적절한 온도에 괜찮은 향만 나면 괜찮다. 나에게도 커피란 카페인 충전이라는 목적이 더 앞선다.
"진하기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난 기본적으로 진하고 봐야 한다. 그렇다고 에스프레소처럼 너무 진하면 안 되고, 보통 커피 마시는 사람이 많이 쓰다는 소리가 입에서 안 나올 정도의 진함이면 만족한다.
한 모금 살짝 들이켜본다. 무난한 게 괜찮다. 제법 진했지만 텁텁하거나 하지 않았다. 아까 아주머니가 커피 만드실 때 보아하니 경력이 좀 있으신 거 같았다.
그런데 가격이, 샷이 추가 됐을 텐데 가격은 기본 가격이다.
아주머니, 아마 사장님 혼자 하시는 가게 같았다. 분위기도 좋고(막상 샵 안에서는 안 마셔봄), 사장님도 친절하고, 맛도 좋고, 무엇보다 가격도 착하고 단골 가게로서 빠질 게 없었다.
이렇게 학원에 있는 내내,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커피숍으로 매일 출근 도장을 찍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선생님들도 이곳의 단골이 되어 어제의 고달팠을 하루, 고달플 오늘의 하루를 달래 줄 카페인 분량을 채워갔다.
"선생님, 저... 커피숍 옮겨요."
"네?! 어디로요?"
"선생님 학원 바로 옆으로요. 호호."
"아 진짜요? 그 이층짜리 건물 오랫동안 비어있어서 보기 싫었는데... 진짜 잘 됐네요!"
그렇게 얼마 후 사장님은 커피숍 확장 이전을 하셨고 예전과 달리 풀타임 직원을 한 명 두었다. 규모가 좀 더 커지고 사람도 많아져서 일거다.
원래 어디든 확장이전 하면 불안해지고 예전만 못 할 수 도 있다는 말이 있었지만 이곳은 꾸준하게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점심시간 이후, 저녁시간 이후엔 빈자리가 없이 빼곡했다. 연령층도 다양했지만 중년 층 아주머니들이 가장 많아 보였다. 탄탄한 단골층 고객을 쌓으신 거 같다.
"선생님은 장가 안 가세요?"
"네. 안 갑니다. 하하."
"에이, 그래도 계속 혼자 있기는 어려울 텐데."
"비혼주의자는 아니지만, 뭐, 아직은 별 생각이 없네요."
"혹시나 가게 되면 꼭 알려주셔야 돼요."
"아이고, 당연하죠. 하하."
이런 얘기도 편하게 오고 갈 만큼 편한 찐 단골이 되었지만 살짝 (좋은 쪽으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결혼 얘기 때문은 아니고, 커피 값을 받을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어서였다.
한 번은 원두를 바꿨는데 테스트 삼아 함 먹어보라고 그냥 주셨고, 한 번은 새로 구워 본 쿠키인데 커피랑 어떤가 시식이라며 또 주시고... 항상은 아니었지만 종종 이렇게 공짜 커피와 각종 쿠키와 패스츄리 등을 내어 주셨다.
나는 종종 학원에 특식으로 요리를 해 올 때가 있었는데 그때 조금 맛보시라고 가져다 드리곤 했다. 그래야 내가 이 커피숍을 오기 편하지 않겠나.
그런데 이러면 잘 먹었다고 커피를 또 그냥 내려주시는 사장님... 내가 졌다.
"모든 손님은 다 소중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이렇게 꾸준히 와 주시는 분은 드물거든요. 이런 분은 손님 그 이상, 귀인입니다. 선생님 덕에 단골도 훨씬 많아지고, 또 그분들이 소개해 주셔서.. 그분들 덕에 제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거죠. 제가 받은 거에 비하면 커피 한 잔은 아무것도 아니죠. 이 커피숍으로 돈을 많이 벌겠다는 욕심은 원래 없었어요. 제가 젊을 때부터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좋은 분들 덕분에 제가 좋아하는 일을 이렇게 꾸준히 할 수 있는 게 너무 감사하죠."
커피숍이든 뭐든, 이런 마인드의 사장님은 롱런할 수밖에 없다.
커피숍은 공간도 제법 넓고, 분위기나 인테리어는 두말할 거 없이 좋아서 아주 가끔 학원생들의 오픈마이크 장소가 되곤 했다.
서울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내려왔을 때 정말 두 팔 벌려 반겨주셨다. 수년간 거의 매일 같이 왔었 던 사람이 몇 년 안 보였으니 오죽했겠나. 사장님의 두 아드님보다 나를 훨씬 더 자주 본다고 하셨으니...
나를 비롯한 학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카페인 충전을 책임지고 사랑방 역할을 하던 이곳은 아직도 같은 자리에 새로운 단골을 맞이하고 있다.
사장님의 오랜 염원(?)이었 던 나의 장가가기 프로젝트가 성사되며 청첩장을 드렸을 때 정말 진심으로 기뻐해 주셨다. (막상 개인 사정으로 결혼식은 못 오셨지만 축의금을 따로 두둑이 챙겨 주셨다.)
이제 사장님도 예쁜 손녀를 둔 할머니가 되셨다.
나도 아주 가끔은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방문할 때면 서로 아이에 관한 얘기가 대부분이다.
기타를 어깨에 메고 매일 같이 들락날락했던 나는 이제 기타 대신 아이 손을 잡고 들어서니... 나의 모습은 많이 바뀌었지만 사장님은 그대로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