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공립 고등학교에 진학하느냐 아니면 지금과 같이 가톨릭 학교로 진학하느냐의 차이다. 분위기로 봤을 땐 거의 모두 가톨릭 고등학교로 진학할 듯했다. 지금과 차이가 있다면, 남녀 공학이 아니고, 또 교복을 입어야 한다. 개인적으론 교복이 편할 거 같다. 옷도 별로 없는데 교복에 검은 구두... 아침에 별 걱정 없이 기계적으로 준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졸업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생각보다 다들 다른 곳에 생각이 가있었다.
바로 수학여행 겸 졸업여행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5박 6일, 오타와, 몬트리올, 퀘벡 시티까지 찍고 오는 나름의 대장정이다.
놀이 공원 가서 놀거나 하는 일정 따윈 없다. 박물관도 갈 것이고, 초콜릿 공장도 갈 것이며, 퀘벡 시골에 가서 메이플시럽 만들기도 할 거고... 이래저래 빼곡한 일정 같지만 자유시간이 많이 있을 거란다.
솔직히 수학여행이 뭘 많이 체험하려고 간다기보다, 친구들이랑 어울리고 하는 게 주 목적인 건 캐나다나 한국이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관광버스에 착석 후 가이드님 말에 주목했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상냥한 여성 분이었다. 우리들 중 크게 사고뭉치는 없지만(다행인 건, 있지만 이번 여행에 불참했다) 그래도 제법 짓궂은 아이들이 몇 있어서 걱정됐다. (나도 짓궂었던 것 같지만 선생님들한테는 안 그랬다.)
자리는 지정된 게 아니라 그냥 아무렇게나 마음에 맞는 아이와 앉으면 됐다. 중간에 내리고 다시 타고 할 때가 많아서 아이들은 여기저기 수시로 자리를 바꿔가며 앉았다.
나는 주로 DK나 프랜시스 옆 자리에 오고 가며 앉았다.
그러다가, 어찌어찌하다 '다빈치'(캐나디안 클럽 VOL.1, 13화 "웨어 알 유 프롬?" 참고) 옆에 앉게 되었다.
나는 이번 여행 때문에 친구로부터 CD플레이어를 빌렸고, CD 몇 개, 그리고 AA배터리를 넉넉히 챙겨 왔다. 이때 내가 주로 듣던 음악은 한국 가요, 락, 메탈, 아주 간혹 힙합으로 짬뽕이 된 음약 취향을 갖고 있었다.
이 중 '언타이틀' 2집이 있었다. CD플레이어에 넣고 재생을 눌렀다.
타이틀 곡 "날개", 정말 잘 만들었다. 멤버 둘이 춤을 추며 라이브까지 소화해야 했던 무대가 떠올랐다. 움직임이 큰 안무와 노래까지 하려니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하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이 당시 한국 음악 방송은 립싱크하는 게 무슨 대역죄인 것 마냥 치부하던 때이기에 애써 무리해서라도 라이브를 강요했던 시절이었다.
옆에 앉아있던 다빈치가 계속 CD재킷에 관심을 보였다. 대뜸 내 한쪽 귀에 있던 이어폰을 자기 귀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무표정,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음악을 들었다.
"야, 이상하지 않아? 가사도 못 알아들을 텐데..."
"아니야. 아주 좋아. 나 이거 계속 듣고 싶어."
매우 진중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버스에서 나와 다빈치는 언타이틀 2집만 무한반복으로 듣게 되었다. 다빈치는 제일 맘에 드는 트랙 몇 개를 불러 주더니 이 거 만 듣자고 했다. 뭐, 그러라고 했다.
몇십 분이 흘렀을 까? 이젠 아예 대놓고 흥얼 거린다. 한국말 제로에 가사도 전혀 이해 못 했지만 나름 비슷하게 흥얼거렸다. 그 걸 본 딴 아이들도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다빈치를 봤다.
근처에 있던 DK는 신기하다는 듯이 웃어 보였고 프랜시스는 나를 보더니 뭐 그 딴 저질음악을 듣냐면서 핀잔을 줬다. 내가 좋아서 듣겠다는데... 정겨운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닥치라고 했다.
그런데, 몇 시간 동안 노래 몇 개만 반복해서 들으니 좀 지겨워졌다. 그래서 다빈치에게 양해(?)를 구했다. 센 음악 좀 들어야겠다고... 알았다고 했고 자긴 별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나 혼자 락을 들으며 귀를 정화시키고 있었다.
옆에서 계속 언타이틀 CD를 만지작거린다. 하아,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도착지까지 언타이틀을 들었다.
머물렀던 호텔, 숙소는 탑급은 아닌 연식이 제법 있어 보이는 곳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에 방도 크지는 않았지만 깨끗했고 관리가 잘 된 느낌이었다. 4인 1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호텔은 학교 단체 여행에 최적화된 그런 호텔 같았다.
별 일없이 여행의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작은 해프닝 하나가 생겼다.
나와 둘 다 친한 프랜시스와 DK, 이 둘은 서로 인사 정도 하는 사이였다. 딱히 친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싫어하지도 않는, 정말 중립적인 인간관계다.
호텔방은 4인 1실이지만 취침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방을 개방해 놨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 방 저 방 옮겨 다니면서 놀았다.
DK는 방문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왜 굳이 문 바로 앞에서 갈아입는지에 대해서는 궁금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이 살짝 열리는 순간 DK는 자기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문을 힘껏 밀었다. 뭔가 쿵! 하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순식간에 밖이 웅성웅성했다. DK는 바지가 타이트했는지 뭐가 잘못됐는지 아직도 갈아입는 중이었다.
문 밖을 빼꼼히 보니 프랜시스가 대자로 거의 기절해 있었다. 놀랄 틈도 없이 갑자기 벌써 일어나더니 문을 박차고 방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문 앞에서 바지 때문에 낑낑대던 DK의 목을 두 손으로 조르기 시작했다.
DK는 무슨 상황인지 전혀 인지를 못했고 한 손에는 자기 바지를 잡고 있었고 한 손은 자기 목을 점점 더 조여 오는 프랜시스의 손을 저지하고 있었다.
DK는 황당하다는 듯이 실실 웃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이 광경이 좀 우스꽝스러워 웃음이 피식 나왔다.
그런데 빨리 말려야 할 듯했다. 프랜시스는 평소에 온순하지만 고난과 역경, 한이 많이 맺힌 아일랜드인의 후손이기에 순간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다.
나를 비롯, 경준이와 몇몇 아이들이 개입하여 겨우 떼어놓았다.
선생님이 오셔서 상황정리 및 오해를 풀었지만 프랜시스의 이마에는 커다란 혹이 남겨진 채 여전히 씩씩 거리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나, 실수인데. 아마 프랜시스는 다음부터는 노크부터 하는 습관을 키웠을 것이고 DK는 굳이 문 앞에서 옷을 갈아입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크게 탈 없이 마무리되었고 학교로 돌아와 집으로 향했다.
여행 막바지에 몇몇 아이들의 장난 때문에 속상했던 가이드 누님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남자아이들 몇은 죄송하다며, 악의는 전혀 없었다고 연신 사과를 했다. 가이드 누님은 별 거 아닌데 자기가 예민한 거라면서 되려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그래도 이 몇 아이들은 도착하자마자 교장실에 불려 가 주말 동안 쉬지 못할 만큼의 과제 한 더미를 받아갔다.
나와 프랜시스, 경준이, DK, 또 많은 친구들이 가톨릭 학교를 택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부분 같은 학교로 배정을 받았다.
우리가 믿음이, 신앙심이 깊어서 가톨릭 학교를 선택했냐고? 그건 아니고 그냥 '익숙함'이 편해서였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어울려왔던 친구들이 대거 같은 학교를 선택했으니 별 다른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 평판도 나쁘지 않다. 다만, 남자 학교라는 게 몇몇 친구들은 상당히 걸려했다.
벌써 졸업이라니... 이 학교에 처음 오고 말도 못 하고 혼자 버벅거렸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게다가 무려 4년, 가장 오래 다닌 학교였다.
생각해 보면 운이 정말 좋았던 것 같다. 좋은 친구들과 선생님을 만난 게 내 퍽퍽한 어린 시절에 도움이 많이 된 건 분명하다.
20 몇 년이 흐른 지금, K-POP의 위상은 대단하다. 한국 아티스트가 빌보드 1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날이 과연 올 까 라는 상상을 하고는 했다. 이는 마침내 내가 어린아이를 둔 아저씨가 되자 이루어졌다.
내가 어렸을 때 (90년대를 아울러서), 학창 시절에는 온갖 다양한 음악이 순위를 치열하게 다투는, 어찌 보면 북미를 비롯한 여러 음악 시장이 르네상스를 맞이한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아니면 내가 직접 보고, 느끼고, 즐기고 해서 더 그렇게 느껴질 수 도 있다.)
Backstreet Boys와 N'Sync가 치열하게 보이 그룹 팬덤을 형성했고 영국에서는 Spice Girls의 데뷔로 전에 유래없는 걸그룹의 힘을 보여줬다.
Britney Spears와 Christina Aguilera는 초대형 여성 솔로 팝아티스트의 라이벌 대전을 제대로 보여줬다.
'뉴메탈'이란 음악 장르도 새롭게 탄생했고, 락, 메탈과 힙합이 크로스오버가 되는 게 어색하지 않을 시기였다. 밴드 음악도 다양했고 에미넴이란 젊은 백인 래퍼가 센세이션을 일으킨 때 이기도 했다.
언타이틀 2집을, CD플레이어의 배터리를 여러 번 갈아줘야 했을 만큼 많이 들었던 다빈치는 과연 수학여행 때 버스 안을 기억할 까? 기억한다면 BTS를 비롯한 다른 K-POP아티스트의 음악을 들어봤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