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이따가 학교 마치고 우리 집으로 와. 보여줄 게 있어."
프랜시스는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나에게 한마디 하고 후다닥 자기 갈길을 갔다.
굳이 쫓아가서 물어보지는 않았다.
"우리 아빠가 얼마 전 고물시장 같은 데서 구해왔다고 했는데... 짜잔!"
기타다. 우리 둘 다 서로 간절히 원하던 일렉기타가 아닌 매우 낡아 보이는,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한눈에 봐도 싸구려처럼 보이는 클래식 기타가 소파에 뉘어져 있었다.
"오... 멋진데? 일렉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이게 어디야."
나는 어려서 피아노를 조금 배웠기에 기본적인 음감이나 악보에 대한 개념이 있었지만 프랜시스는 그냥 되든 안 되든 이리저리 쳐보기 바빴다.
"야, 너 '도'(Do)가 어딘지 알아?"
"알 게 뭐야? 락, 메탈 광팬인 내가 '도'를 굳이 알아야 해?"
뭐,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이걸로 시험을 볼 것도 아니고... 순수 즐길거린데 본인이 하고 싶은 것만 해도 되겠다.
가뜩이나 자주 들락거렸던 프랜시스 집에 더 자주 왕래했다.
둘이 같이 숙제도 했지만 주목적은 기타를 치는 것이기에 프랜시스 집 지하실은 항상 음악 소리와 기타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난 원래 오래전부터 기타를 사달라고 졸랐다. 캐나다 이민 온 지 얼마 안 돼서부터 조르기 시작했는데, 역시, 씨알도 안 먹혔다. 아버지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짧게 안 된다고 만 얘기했다. 아버지에게 기타는 그저 값 비싼 장난감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거다.
어릴 때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일렉 기타에 대한 호기심은 항상 있었다. 무엇보다, 멋져 보였다.
기타 얘기를 꺼냈을 때마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던 말은 "너 피아노도 하다가 그만뒀잖아. 기타도 대충 하다가 그만둘 거 같은데."
나는 피아노를 계속 배우고 싶었고, 치고 싶었답니다. 학원을 일방적으로 끊은 건 내가 아닙니다, 에헴.
몇몇 친구의 집에 기타가 있었지만 그다지 친하지는 않아서 수시로 오며 가며 기타를 빌려 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러던 와중 프랜시스에게 기타가 생겼으니 오히려 이 녀석 아버지에게 내가 더 고마워했을 정도다.
"그래서, 누가 더 잘 치니? 내가 얼핏 들었을 때 프랜시스보다 네가 더 나은 거 같던데. 호호."
어머님의 한 표를 얻었다. 프랜시스는 즉각 반발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단다. 자기가 훨씬 낫단다.
뭐, 그러든지 말든지, 네 손가락은 항상 너무 뻣뻣하다며 내가 항상 지적했다. 그러더니 넌 나 못 따라온다고 받아쳤다. 이 녀석은 그냥 씩씩 거릴 뿐이다.
기타를 치면 칠수록 나의 열망은 더욱 깊어만 같다.
주말만 되면 다운타운 악기상 여기저기를 들쑤시며 기타를 치곤 했다. 한 군데 너무 오래 머무르면 눈치가 보이니 조금 한산한 곳은 격주로, 규모가 크고 붐비는 곳은 티가 잘 안 나니 매주 가서 기타를 치곤 했다.
말 그대로 악기를 구매할 의향이 있어서 '테스트'차원에서 기타를 쳐볼 수 있는 조건인데 누가 봐도 너무 대놓고 치곤 했으니... 토론토에서 가장 유명한 악기상 한 곳의 매니저가 나에게 조용히 말을 걸었다.
"너... 이거 살 거야? 아무리 봐도 아닌 거 같은데 다음부터 여기서 뭐 치려면 뭐든 사놓고 치거라."
사든가 아니면 나가라는 거였다. (훗날 이곳에서 나의 첫 기타를 구입하게 된다.)
집에 돌아와 내 방 작은 창문 밖을 바라봤다. 길 건너편 상가들이 보인다. 몰랐었는데 촌스러운 옅은 청록색 바탕의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무슨무슨 music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아하니 레코드숍 아니면 악기상 같았다.
이사 온 지 그다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왜 이제야 눈에 띈 거지?
다음날 상가 앞에서 서성였다. 보아하니 피아노 가게 같았다. 그랜드 피아노 몇 대와 업라이트 피아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리는 악기를 보호하려는 차원이었는지 선팅이 살짝 되어있었고 매장 내부 깊숙한 곳 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출입문은 작고 일부는 유리로 되어있었다. 선팅이 상대적으로 진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기타와 비슷한 형상의 무언가 보였다.
대형 악기상에서 안 살 거면 나가라는 식의 면박을 받은 직후라서 소심함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 하고 있었다.
'에잇, 내가 죄지었나? 들어나 가보자.'
으잉?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오른쪽 벽면에 기타가 빼곡하게 걸려있었다. 대부분 통기타였지만 일렉기타도 몇 대 보였다.
매장에 손님은 아무도 없었고 뒤 쪽에서 아저씨, 아니 형 아니면 삼촌 뻘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반갑게 맞이했다.
"저, 그냥 기타 좀 구경하러 왔어요."
"네. 편하게 보세요. 쳐보고 싶으면 부담 없이 말씀하세요."
"이 거... 앰프에 연결해 봐도 될까요?"
"그럼요. 케이블 여기 있습니다."
인상이 매우 좋은 친절한 청년이었다.
그러고는 자기 볼 일을 보러 다시 매장 사무공간 쪽으로 갔다.
매장은 넓었다.
환한 형광등 조명이 아닌, 따뜻한 전구색 조명이 은은하게 매장을 감돌았다. 가뜩이나 비싼 피아노를 더 고급스럽게 만드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검은색 피아노 위에 빛이 반사되니 아늑하면서 따뜻한 느낌을 주었다.
나름 고급진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나는 찢어지는 듯한, 완성도가 떨어지는 메탈 기타 *리프 여러 가지를 튕겼다.
*일반적으로 음악계에서 '리프'는 록, 메탈 계열 음악에서 기타리스트가 반복해 연주하는
4마디/8마디 프레이즈 phrase를 가리킴. 록의 고전으로 정착한 곡들은 대개 단순하고 각인이 잘 되는 리프를 포함하며, 그 리프가 곡을 이끌어 줌.
출처: 네이버 오픈사전
손님이 거의 없거나 있어도 뜨문뜨문 있었기 때문에, 또 게다가 여기 계신 형님(?)이 매우 친절했고 일절 간섭을 안 했기에 나는 거의 매일 이곳에 와 기타를 치곤 했다.
어찌 보면 그냥, 진상이다. 사지도 않을 거면서 악기 하나를 거의 중고로 만들어 버리기 일보직전이었으니... (그런데 이미 살짝 중고 상태였다.) 그래도 양심상 내가 계속 치던 것만 쳤다.
한편으로 궁금했다. 장사가 되게 안 되는 거 같은데 어떻게 이 큰 매장을 운영하는지.
"실례지만... 정말 궁금해서 그러는데... 여기 장사는 좀 되나요?"
뜬금없는 질문이다.
형님은 환하게 웃으면서 "네가 기타 하나 사주면 더 잘 되겠지? 하하."
윽, 뭔가 훅 하고 들어온다. 내 표정이 많이 당황스러워 보였나 보다.
"농담이고 신경 쓸 거 없어요. 아까 그 질문에 대해서는... 자, 여기 피아노 가격을 한 번 보세요."
검은색 그랜드 피아노 한 대를 가리켰다. 밑에 가격표가 붙어있었는데.... 헉... 20,000달러... 차 한 대 값이다. 그것도 나름 괜찮은 차... (90년대 후반이다)
다른 악기상처럼 자잘한 거 팔아서 수익을 내는 구조가 아니라 진짜 자동차 딜러처럼 장사를 하는 곳이었다.
일본 유명 악기 브랜드 대리점인 이곳은 피아노뿐만 아니라 기타, 베이스, 드럼도 이 브랜드에 있는 라인업이기에 다른 여러 악기도 전시와 판매를 하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 숱하게 왔지만 이곳 형님과는 말을 많이 못 나누어봤다.
"혹시, 이곳 사장님이세요?"
"아니요. 제 아버지가 사장님이고 저는 매니저입니다. 사장님은 주로 다른 매장(본점)에 계세요."
"제가 집이 가까워서 여기 자주 오게 됐는데... 아직 기타가 없지만 사긴 살 거라서..."
"전혀 신경 쓰지 마세요. 영업시간에는 언제든지 와도 좋습니다."
하아, 눈물이 살짝 날 정도로 감사했다.
"저는 삼오입니다."
"나는 테리야. 거의 매일 보지만, 반갑다."
또 이렇게, 귀한 인연을 맺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