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대략 걸어서 5분 거리, 시끄러운 대로변 네거리, 나의 아지트 중 한 곳이 자리하고 있었다.
2층 짜리 기다란 상가건물, 가장 넓게 은행이 차지했고 조그마한 피자 가게가 있었다. 그 사이 작은 간판과 지하실로 내려가는 어둑한 계단이 있다. 얇은 철문을 열고 들어 가면 먼저 들리는 소리는 아저씨들, 어르신들의 대화소리, 그다음 진한 담배 냄새가 코로 훅하고 들어온다.
지하에 제법 넓고 탁 트인 공간에는 당구대가 열 대 정도 있었고 입구 쪽 기다란 바테이블 한 편에는 슬롯머신처럼 생긴 오락기 두 어대가 자리를 차지했다.
실내 깊숙이 들어가 보면 오락기 열 대 정도 되는, 한국의 대형 오락실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규모지만 당시에 핫한 게임 어지간한 건 취급했다.
"작업실"이라 불렸던 이곳의 본 기능은 당구장이지만 오락하러 오는 손님도 적지 않았기에 복합 오락시설이라고 하는 게 맞겠다.
꼭 당구를 치거나 오락을 하기 위해서만 오는 공간은 아니었다. 동네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의 역할도 했던 장소이기도 했다. 연락 방법이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시대로 넘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했다. 누구는 지하라고 휴대전화가 잘 안 터져서 올라가 통화를 하기도 했고, 어느 어르신의 부인은 작업실로 직접 전화해 남편에게 빨리 집으로 오라고 독촉이 전달되기도 했다. 집에 가기 싫은 어르신은 눈 빛으로 나 여기 없다고 당부하지만 얼마 뒤 부인에게 직접 끌려나가던 정겨운(?)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는 곳이었다.
직원들은 놀랍게도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반듯한 정직원들이었다. 짧게는 3년 차, 길게는 이곳 역사와 함께 시작한 분도 계셨다. (난 막상 이곳이 언제부터 영업을 했는지는 모른다.)
손님의 연령대는 대중없었다. 적게는 이제 갓 고등학교를 입학한, 앳되어 보이는 학생부터 많게는 성인이 된 손자, 손녀와 내기 당구를 치러 오는 어르신까지 다양했다.
주머니 사정이 가벼웠던 나와 프랜시스 무리는 주로 오락실 쪽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주말에서야 당구 한 두 게임을 곁들이는 정도였다.
이곳 사장님인 윌리 아저씨는 반쯤 대머리에 매우 좋은 인상을 지닌 분이었다. 스코틀랜드 혈통으로 당구와 골프광이었다. 개인 용도로 퍼팅 연습 공간을 따로 마련해 놓았고 단골손님에게도 흔쾌히 연습을 허락했다.
이 사장님의 최대 장점은, 돈을 얼마를 쓰든 간에, 얼마나 죽치고 있던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오락 한 판만 하고 한두 시간 버텨도 뭐라 하긴커녕 친근한 말동무가 되어 주곤 했다. 나이가 많던 적던, 단골손님은 모두 윌리 사장님께 절대적인 리스펙트가 받침 돼 있었다.
"저... 죄송해요. 요새 당구 칠 돈이나 오락할 돈이 좀 궁한데.. 만남의 장소로는 여기만 한 데가 없어서... 하하.."
"나는 그냥 여기를 찾아주는 모든 이들이 좋단다. 돈만 보고 장사할 거면 다른 장사를 했지. 난 이 사람 저 사람 북적거리는 게 좋단 말이지."
하도 들락거리니 새로운 오락기가 들어올 때마다 테스트 차원이라면서 온종일 공짜로 게임을 해주게 하는 정겨운 사장님이다.
그렇다고 마냥 퍼주기만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계산이나 이런 것들은 상당히 철저한 거 같았다.
작업실 천장 곳곳에 공기 청정기가 설치되어 있었으나 골초들의 담배 연기를 모두 빨아들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게다가 창문도 없는 지하였으니 이곳에 5분만 머물러도 옷에 담배냄새가 배기 일수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무렵에 제대로 담배맛을 알게 된 터라 이곳은 나와 프랜시스를 비롯한 여러 친구들의 공식 흡연실이었다. 캐나다에서 미성년자 학생들이 길에서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담배를 피우진 않았지만 다들 왠지 모를 죄의식이 마음 한 편에 자리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공기질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곳은 흡연인이 아니라면 좀처럼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도 아주 간혹 가다가 어린 꼬맹이들도 보였다. 삼촌이나 아빠 따라 당구 치러 온 아이들이었다. 90년대 후반이니, 흡연 문화가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던 때이기도 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해도 한두 시간 머무르는 건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꼬맹이 중, 그것도 초등학교 저학년 꼬맹이가 종종 이곳을 들락거렸다.
내 동생 녀석이었다.
내가 왜 이 녀석을 데리고 작업실에 들락거렸냐면, 집에 혼자 놔둘 수 없으니까.
부모는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에 내가 이 녀석을 돌봐야 하는 일이 잦았다. 법적으로 얘를 혼자 집에 두면 안 됐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온 것이다.
법도 법이지만, 아무래도 혼자 집에 두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다.
선택권은 세 가지.
첫째, 집에 짱 박혀서 둘이 있는다.
둘째, 법이고 나발이고 동생 녀석을 집에 혼자 놔두고 나 혼자 밖에 돌아다닌다.
마지막, 그냥 얘도 같이 데리고 돌아다닌다.
피치 못하게 동생과 이곳을 올 때면 윌리 사장님은 동생에게는 무한대로 공짜 오락을 할 수 있게 해 줬다.
형과 친구들이 담배 연기를 뿜어대며 욕 섞인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게 어린아이의 건강과 교육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의식이 있었음에도, 집에 혼자 안 놔두고 다니는 게 어디냐며 나는 스스로 합리화했다.
배가 고파지면 1층 피자 가게에서 허기짐을 해결하고 다시 오락에 집중을 했다.
한국에서는 당구장에 짜장면이 국룰이지만 작업실에서 만큼은 싸구려 피자 한 조각에 아이스티를 마시는 게 진리였다.
다행히 이 녀석은 내 친구들을 매우 잘 따랐고 나랑 밖에 다닐 때면 말을 잘 들었다.
2000년대 초반 들어 모든 실내 건물에서 금연을 실시했다.
이로 인하여 가장 많이 피해를 봤을 업종들은 술집과 당구장 같은 시설들이었다.
나도 이쯤부터 작업실 출입이 뜸해졌다. 담배 한 대 꼬나물고 오락기 버튼을 눌러대는 재미가 컸는데 법으로 막 혔으니...
아니면 그냥, 이곳에서 있는 게 시간낭비라는 걸 깨달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동생 녀석은 이때의 추억(?)을 기억하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몇 달 전 카톡이 왔다.
내용은 대충, 형 친구들과 여기저기 데리고 다녀서 좋았단다.
못 된 모습을 많이 보인 형이었지만, 데리고 다니기를 잘한 거 같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과의 추억이 많지 않다. 같이 산 날보다 떨어져 산 날이 훨씬 많다.
그래서 "작업실"이 더욱이 생각이 나는 거 같다.
우리 둘 다 서로 집에서보다는, 이곳에서 더 신나게 웃고 떠들 일이 많지 않았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