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학교 조퇴하고... 자, 여기로 오면 된다."
아버지가 작은 쪽지에 건물 이름과 주소를 하나 적어 건넸다.
어디 보자... 버스를 타고, 지하철 몇 정거장에 내려서...
흠, 대충 어딘지 알겠다.
혼자 정처 없이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던 이력으로, 그 감으로 대략적인 위치 파악이 가능했다.
토론토는 도시가 바둑판 처럼 되어있는 구간이 많아서 주소로 길 찾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부슬부슬하게 내리는 가을비를 조금 맞으며 도착한 곳은 정부 기관이었다.
부모와 동생도 얼마 전에 도착한 듯 보였다.
우리 일행 말고도 스무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있었다.
어느 직원의 안내를 받아 강당 같은 곳으로 들어갔다.
작은 강당 같은 곳이었다. 언뜻 보기에 교회 같기도 했고 법정 같기도 했다.
오늘은, 캐나다 시민권 수여식을 위하여 사람들이 모였다.
그렇다. 캐나다에 정착한 지 대략 5년, 공식적으로 '캐나디안'이 되는 날이다.
강당에 모인 사람들을 보았다.
대부분의 표정은 상기되어 있었다. 시민권을 취득했다는 일종의 뿌듯함도 보였고, 어느 분의 얼굴은 비장함과 자부심까지 묻어나 있었다.
판사 같은 분께서 등장하자 모두 자리에 일어서서 존경의 표의를 보였다. 다시 착석.
축사를 마친 뒤 모두 일어서서 캐나다 국가를 제창했다.
캐나다 국가는 깔끔하게 1절이다. 다만, 불어 버전도 불러야 했는데 좀 전에 자신 있게 불렀던 것에 비해 불확실한 듯, 소심하게 불렀다.
불어는 퀘벡 주의 언어이고 뉴브런스윅 주 일부에서만 쓰이지만 엄연한 공용어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도 필수 과목이다.
국가 제창을 마치고 사람들은 박수를 쳤다. 그리고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서로 축하의 말을 건네며 악수를 했다.
제법 연세가 있어 보이는 어떤 분은 감격의 눈물도 보였다. 사연이 많은 분 같았다.
내가 봤을 땐 우리 가족이 제일 덤덤해 보였다. 그나마 감정 표현이 제일 없는 아버지의 얼굴 표정이 밝았다.
단체 기념 촬영이 끝난 후 여기저기서 사진 촬영 부탁을 했다.
디지털카메라라는 존재는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장에 침투하기까지는 아직 몇 년이 더 남았다.
여기저기서 찰칵 소리와 플래시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가족도 캐나다 국기를 배경으로, 인상 좋아 보이는 아저씨에게 사진 촬영을 부탁했다.
"좋은 날인데, 다들 좀 웃어보세요."
난 나름 웃는다고 웃었는데, 내 표정은 사진이 나와봐야지 알 것 같다.
가족 모두에게 특별하고 기념비 같은 하루 지만, 기분이 밝지만은 않았다.
아직 학생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캐나다 국적 취득의 의미를 중요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던 거 같다.
그럼 난 이제,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한국인이 아닌 캐나다인이 된 것인데... 이제 이곳이 정녕 나의 조국인 것인가?
나름 특별한 날이라 외식이라도 할 줄 알았지만, 뭐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우리 가족은 밖으로 나와서 서로 갈길을 향했다. 아버지는 어딘가로, 동생과 어머니는 집으로, 나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며칠 뒤, 아버지가 현상해 온 사진들을 봤다.
커다란 캐나다 국기 옆에 우리 네 식구가 서서 찍은 사진을 유심히 봤다.
나는 나름 웃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옅은, 어색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어머니도 거의 무표정에 가까웠고 동생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버지만 밝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서로 가깝게 선 다고 섰는데, 우리 사이의 공간은 사람 한 명은 족히 들어가고도 남을 틈을 두고 서 있었다.
사진에서의 얼굴 표정과 서로의 거리가 우리 가족 관계를 말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가족사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