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버스를 탔다. 그다음 지하철,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다운타운에 있는 유명 악기상이었다.
패션과 예술로 힙한 동네에 (서울로 치면 홍대랑 비슷한 느낌의 동네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있을 거 다 있고 가격도 경쟁력이 있는 곳이라 토론토에 거주하는 뮤지션이라면 적어도 한 번쯤은 발도장을 찍었을 곳이었다.
나도 여기를 자주 들락거리다가 안 살 거면 나가라는 매니저 때문에 한동안 와보지 못했던 곳이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실제로 기타를 사러 왔기 때문이다.
기적적이고 역사적인 하루가 될 것이다. 거의 수년간의 설득 끝에, 온전한 나만의 악기를 갖게 되는 날이다.
아버지의 기준은 간단명료하다. 싼 거. 그다음에 더 좋은 걸로 하자는 것이다.
난 아버지를 잘 안다. 다음에 더 좋은 거? 그 딴 건 없다. 지금 최대한 뽑을 수 있을 만큼 뽑아야 한다. 설득을 하든 뭘 하든 최상의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눈여겨봤던 모델 몇 가지 중 리스트 가장 상위에 있는 걸 테스트해 보기 시작했다. 가격은... 1,800 (캐나다) 달러... 가격도 가장 탑이다. 2,000 달러 이상은 아예 먹히지도 않을 것이기에 아예 리스트에서 제외했다.
아버지 눈치를 살핀다.
"이거로 할 거냐? 1,500까지 깎아주면 하고 아니면 안 돼."
협상을 시작한다. 현금가라도 1,500은 터무니없다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좀 그렇다.
그냥, 더 싼 거 하라는 얘기다. 아버지에게는 애당초 1,000달러 이상은 고려 대상이 아니었나 보다. 어차피 큰 기대를 안 했기에 실망이 크진 않았다.
눈여겨봤던 게... 어디 있더라? 직원에게 물어보니 팔렸단다. 지금 주문 넣으면 몇 주 정도 걸린단다. 하아, 안 된다. 어떻게든 오늘 악기를 들고 이 매장을 나와야 한다.
나는 안타깝게도 기타는 없지만 악기에 초보가 아니다. 그동안 이런저런 기타를 많이 접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눈높이가 상당히 올라가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첨 보는 악기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진한 체리색에, 디자인이 그럭저럭 점잖지만 강렬해 보이는, 전형적으로 락, 메탈 하기 좋아 보이는 악기였다.
가격도 750달러. 나쁘지 않다.
시연을 해봤다. 작은 내 손에 잘 감긴다.
첫눈에 반해버린(?) 이 녀석으로 결정했다.
너무 설렜다. 집에 오자마자 이 것만 계속 붙들고 있었다.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와서 대뜸 묻는다.
"이 거 얼마니?"
"750달러요..."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방을 나갔다.
몇 일째 방에만 틀어박혀서 기타만 치던 중, 왼손바닥 부분에 뭔가 계속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
맙소사, 기타 넥 한 부분, 나무가 살짝 손상되어 파여 있었다. 이게... 살 때부터 그랬는데 내가 몰랐던 거 같다.
순간 패닉에 빠졌다. 악기를 들고 바로 악기상으로 향했다. 교환을 하든 해야 했다.
악기상 도착. 내 기타를 한 번 보더니 자기들 불찰이 맞는 거 같다고 한다. 아니면 애당초 공장에서 불량이 나왔던가.
다행이다. 이제 동일 모델로 교환하면 끝이다. 그런데... 재고가 없단다.
한숨만 나왔다. 뭐가 이렇게 어렵나.
두리번거리던 와중, 엇? 원래 지난번 왔을 때 없었던, 내 리스트 상단에 있었던 모델이 입고가 된 것이다. 몇 주 걸린다고 하지 않았냐 물어보니 가끔 빨리 올 때가 있단다.
문제는 가격인데... 기존 것 보다 150달러 더 비쌌다.
혹시 몰라서 내 전재산을 싹싹 긁어왔다,
교복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동전들과 구겨진 지폐들을 꺼내봤다.
하아, 50 몇 달러 부족했다.
직원도 진심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고 내 얼굴의 표정은 아마도 월드컵 결승전 종료 직전 자책골을 넣은 선수의 표정이 아니었을 까...
그러던 와중, 예전에 나를 쫓아냈었던 매니저가 왔다.
전에도 느꼈지만, 인상이 참 더럽다. 진짜 안경 쓴 불독 같았다.
"이거.. 그냥 얘 돈 되는대로 해 줘."
그러고는 나한테 윙크 한 번 날리고 돌아서서 다른 곳으로 갔다.
와... 쿨내가 진동하다 못해 오싹할 지경이었다. 완전 츤데레 아닌가.
그렇게 난 룰루랄라 집으로 와서 새로 입양한 아이를 어루만지며 연주를 했다.
난 정말 재수가 없는 것일 까...
교환해 온 악기에 또 문제가 생겼다. 아니, 원래 있었던 하자를 또 발견 못 한 듯했다. 악기 파트 한 부분이 계속 비정상적으로 가라앉는 현상이 벌어졌다.
또 그렇게 나는 악기상을 향했다.
같은 직원이다. 한숨을 깊게 내뱉는다. 이 또한 공장에서 나올 때부터 문제인 거 같다고 말했다.
이번엔 따지고 들었다. 당신네들은 명색이 이 대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악기상인데 검수 같은 거 똑바로 안 하냐고...
며칠 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를 설득해 다시 악기상으로 왔다.
아버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심기가 많이 불편해 보였다.
악기상까지 먼 걸음을 한 것도 마음에 안 들고 돈을 추가로 더 주고 다른 걸로 바꾼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결국 나는 내 리스트 하단에 있던 녀석을 입양하기로 했다. 예전에 테스트도 살짝 해봤다. 이때 한참 메탈에 심취해 있던 내가 봤을 때 디자인이 너무 밋밋했다. 메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제법 뻔하고 점잖은 디자인의 악기였다. 그래도 계속 눈에는 들어왔다. 왠지 모를 매력에 계속 빠져들었다. 소리도 예쁘고 손에도 잘 감겼다. 이 아이를 놔두고 가면 집에 가서 계속 생각이 날 것만 같았다.
직원분은 내가 또 오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엄청 꼼꼼하게 검수를 했다.
가격은 1,100달러. 결국 웃돈을 더 주고 데리고 나왔다.
한 참 신나서 기타를 치는 중 어머니가 방에 들어와 물었다.
"이 건 얼마니?"
가격을 얘기했다. 표정이 안 좋았다. 또 별말 없이 방으로 나갔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또 한바탕 하겠구나. 이유야 간단하겠지. 왜 비싼 거 사줬냐고. (물론 코딱지만큼이긴 하지만, 내 지분도 들어가 있다)
에라 모르겠다. 난 그냥 제대로 된 내 악기가 생겨서 좋았다.
내 첫 악기는 테리 형님의 숍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구입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테리 형님은 단일 브랜드만 취급했다. 선택의 폭도 매우 좁았고 무엇보다, 내가 원하던 게 하나도 없었다.
무대도 많이 서보고, 녹음실에서도 같이 시간을 많이 보낸 녀석이었다. 그만큼 병원도 많이 갔었고 세월의 흔적도 곳곳에 묻어났다.
우여곡절 끝에 데려온 나의 첫 기타는 2010년대 중반, 제자에게 양도할 때까지 나와 함께 동행했다.
지금은 그 제자와 연락을 하고 지내지 않아 나의 보물 #1의 안부는 알 수 없다.
그래도, 어디 있든지 간에 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