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 그룹으로 해야 하는 큰 과제 같이 별일 아니면 항상 매장으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올 때마다 기본 두세 시간은 있다 간 거 같다.
평소와 크게 다를 게 없던 어느 날이었다.
"오, Fade to Black (메탈리카 'Ride the Lightning' 앨범의 수록곡)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으잉? 이 노래 아세요?"
"그럼! 잘 알고 말고."
갑자기 기타를 앰프에 연결하더니 현란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뭐지? 대반전이었다. 이 형님은 겉으로 봤을 때의 이미지는 뭐랄까... 흠, 샌님 같다고 해야 할까?
항상 세미 정장 풍의 패션과 잘 다듬어진 헤어스타일, 상당히 젠틀한 화법을 사용했다. 매우 반듯한 교회 오빠 같은데 내가 동경하고 좋아하는 밴드들의 기타 리프와 솔로를 연신 쳐대고 있으니... 나는 무언가로부터 세게 얻어맞은 것 마냥 한 동안 넋을 잃었다.
"피아노만 치시는 줄 알았는데, 반전이네요? 왜 기타 칠 줄 안 다고 말 안 했나요?"
"피아노는 시늉만 낼 줄 아는 정도지 뭐. (아니다. 잘 쳤다.) 기타는, 네가 칠 줄 아냐고 안 물어봤잖아. 하하."
매장 내에 있는 컴퓨터 앞으로 와보란다. 여기에 음악 재생 리스트가 있었는데 익숙한 밴드 음악이 많았다.
이 형님도 알고 보니 락과 메탈 광이었다. 뿐만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도 섭렵하고 있는 듯했다.
학창 시절부터 밴드에서 주로 기타를 연주했고 지금도 친구들과 종종 모여서 합주를 한다고 했다.
나는 이제 제대로 기타 세계의 입문하는 입장이었기에 테리 형님은 나에게 대선배이자 멘토 같은 분이었다.
기타에 대해 궁금한 게 천지였던 나는 어디선가 막힐 때 종종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했다. 혹시 레슨도 하냐고 물었지만, 그냥 궁금한 거 있을 때 물어보란다.
내가 형편이 어려워도 어떻게 맨날 맨 입으로 있을 수 있으랴. 가끔씩 하는 청소나 매장 정리 같은 것도 옆에서 거들었다.
형님은 간단한 기타 수리 같은 것도 했기 때문에 기타 줄갈기 같은, 상대적으로 단순한 것들은 내가 도맡아서 했다.
아주 가끔 형님이 자리를 비워야 하는 상황에는 내가 매장을 지키고 전화도 받았다.
나는 주로 교복을 입고 있었기에 나름 단정하고 깔끔한 느낌이 들었다. 매장에 누가 오면 인사하고 응대를 하니 손님들도 내가 당연히 직원인 줄 알았다.
기타란 악기 자체에 노하우도 많이 쌓이다 보니 매장 방문 손님들에게 세일즈도 했다. 돈을 보고 하는 세일즈가 아닌 철저히 고객(?)의 입장에서 설명을 하곤 했다. 이렇게 해서 실제로 기타 몇 대를 팔기도 했다.
"만약 악기를 팔게 되면 거기에 대한 커미션을 줄게."
테리 형님이 제안을 했지만 난 선뜻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내 연습실(?) 사용료와 악기 임대료에 비하면 너무 보잘것없이 느껴졌기 때문에 보수를 받으면 마음이 불편할 것 만 같았다. 그래도 그 건 그렇게 해야 한다는 확고한 형님의 입장을 꺾기는 힘들었다.
"정 불편하면 악기 팔지 말던가. 헤헤."
테리 형님은 본인의 음악 동료와 친구들도 많이 소개해줬다. 덕분에 같이 합주할 기회도 많이 얻었고 나의 연주 실력도, 나도 모르는 사이 조금씩 늘어 가고 있었다.
주변에 좋은 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미천한 연주 실력이지만 작은 공연이나 소규모 무대에 끼어서 오를 수 있는 기회도 많이 받았다.
생각보다 많이 사교적인 형님은 자기 친구들의 파티나 행사에도 나를 종종 초대했다. 나보다 여덟 살 많은 형님 덕분에 또래들보다 좀 더 일찍 어른들의 세계(?)를 접할 수 있었다. 형님 또래부터 하여 많게는 스무 살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아무리 캐나다지만 나이와 전혀 상관없이, 아무 허물없이 지내기가 쉽지만은 않다. 아무래도 음악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내가 한국으로 오기 직전까지 가장 자주 보던 사람 중 한 명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형님은 음악 작업실, 합주실 및 녹음실을 차렸다. 나도 이곳에서 자잘한 일도 하면서 레슨을 하기도 했다.
지금 현재는 규모를 더 키워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 프로듀싱도 하고, 연주도 하면서 가르치기도 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즐겁게 살고 계신 듯하다.
이제는 아주 가끔씩 안부만을 주고받지만, 소원해진 게 아니라 SNS로는 전부 담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꼭 얼굴 보면서 할 이야기들 말이다.
나에게 항상 조건 없이 퍼주기만 했던 형님이다. 막상 나는 뭘 해드린 게 없다.
훗날 기회가 된다면 (아니면 만들어서) 어떻게든 보답을 해드리고 싶다.
음악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적으로 나에게 큰 영향을 준 착한 형님...
항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