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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칠면조보다 닭고기가 더 낫지만...

by 이삼오

"야, 이번엔 좀 일찍 와. 4시쯤 오면 될 거 같다."



프랜시스의 통보다.



매년 10월 추수감사절, 12월 크리스마스에는 프랜시스 집에서 거하게 저녁을 먹는다.



한국으로 치면 추석, 설날과 같은 명절이니 상다리가 후달거리게 음식을 차려 놓고 먹는다.



가족, 친지뿐만 아니라 친한 친구들도 초대하는데, 나는 언젠가부터 매년 이 저녁 식사에 합류했다.



주로 초대 대상은 프랜시스의 삼촌들과 숙모, 사촌들, 누나들의 남자 친구, 그리고 나, 때로는 경준이도 오곤 했다.



멤버들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나는 몇 년째 고정 멤버로 참여했다.



식전에 각종 와인과 치즈, 크래커 등으로 시작해 이야기 꽃부터 피운다.



프랜시스의 아버지는 술을 끊으신 지 좀 되었다. 프랜시스가 어릴 때까지 알아주는 술꾼이라고 했다. 그러나 알코올 중독이 심해서 술을 끊든, 가족을 끊든 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들었다.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항상 화이트 와인을 선호하셨고 큰 누나는 술이면 뭐든 다 환영이다. 작은 누나도 딱히 주종을 가리지는 않지만 독주를 더 선호한다.



큰 누나는, 술을 마시면 가끔 진상이 될 때도 있다. 감정 기복이 심해지고 언성이 올라간다. 식구들에게 항상 쌍욕을 몇 번 듣고야 얌전해진다.



나는 실은 성인이 되어서도 술을 즐겨 마시지는 않았다. 한국에 다시 들어와 살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많이 마시기 시작했다. 기껏해야 맥주 두 캔, 와인 두 어잔이면 충분했다.



내가 프랜시스 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었던 건 2002년도부터였다. 만 19세가 온타리오 주의 합법적인 주류 구입 및 소비 나이다. 프랜시스의 어머니는 이런 면에선 칼 같으셔서 합법적인 나이가 되어서야 와인을 주셨다.




주방 한편에 기다란 보조 테이블 위에 음식이 한 상 차려졌다.



칠면조는 프랜시스의 아버지가 이미 요리용 전기톱으로 살을 깔끔하게 발라놓은 상태였다.



스터핑 (칠면조를 구울 때 몸통 안에 채워 넣는 소, 한국에서는 주로 찹쌀을 넣는 개념과 비슷하다), 크랜베리 파이, 샐러드, 감자 요리, 구운 채소 등 영양소뿐만 아니라 맛까지 훌륭하게 잡아내신 프랜시스 어머니의 요리 솜씨였다.



간은 전반적으로 세지 않고 조미료도 거의 안 들어갔으나 맛은 전혀 흠잡을 때 없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정성이 듬뿍 들어간, 제대로 된 집밥이자 명절 음식이다.



개인적으론 칠면조보다 닭을 더 선호한다. 칠면조는 닭에 비하면 많이 쫄깃한 편이다. 안 좋게 표현하자면 많이 퍽퍽하다. 심지어 다리나 날갯살도 닭가슴살 같은 느낌을 줄 때도 있다. 오븐 약불에 하루 종일 구워야 하는 지라 보통 정성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게 아니다.



나나 프랜시스가 성인이 되기 전에는 우리 몫을 접시에 담아 지하실로 내려가서 먹곤 했다. 우리가 좋아하는 TV 쇼를 보거나 콘서트 dvd를 감상하면서 먹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후, 정식으로 어른들 테이블에 합류해 술도 한 잔씩 홀짝이면서 식사를 했다.



'어른 테이블'에 앉으면 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우스꽝스러운 종이 왕관을 머리에 쓰고 식사를 하는 것이다. 이게 왜,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뭐... 그냥 이 집 전통이라니까 그런가 보다 했다. 솔직히 서로의 모습이 조금 우스우니 식사 중간중간 웃음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차가워진 칠면조 부스러기에 짭조름한 그레이비를 붓고, 실온에 오래 놔둬진 남은 치즈는 더욱 부드러워지고 풍미가 올라와서, 둘 다 훌륭한 안주가 되었다.



와인 몇 병이 비워졌을 때쯤이면 프랜시스 어머니의 시그니쳐 디저트가 나온다. 이름은 아직도 모르겠다. 기억력이 좋은 나인데, 트러플 (송로버섯이 아닌) 뭐였는데 기억이 안 난다. 부스러진 생크림 케이크 같은 것에 각종 과일, 특히 베리류들이 많이 들어간, 그리 달지 않은 깔끔한 맛을 내어준다. 이 것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면 공식적으로 식사는 마무리되고 술을 더 마실 거면 지하에서 더 마시던가 단골 바(bar)로 향한다.



바에 가면 분명 닭날개 및 이것저것 시킬 텐데, 위에 그럴 여유가 전혀 없다. 집에 술도 많겠다, 그냥 안주 없이 술만 홀짝거리기로 한다.





한국에서 명절 땐, 아버지가 새 장가를 가기 전, 우리 집은 설에 항상 만두를 잔뜩 빚어 먹고는 했다.



한 집에 나, 아버지, 할머니와 막내고모네 세 식구가 살았다. 둘째 고모의 다섯 식구는 같은 골목 한 집 건너에 있었다. 셋째 고모네는 그리 멀지 않은 시골마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다. 온 식구가 다 모여 만두를 빚고 모양이 못나거나 터진 것은 바로 쪄서 국그릇에 담아 숟가락으로 퍼먹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만두는 간이 심심했고 소는 덩어리가 많이 씹혔다. 대형 만두피를 썼기에 나에게는 왕만두였다. 손에 만두 하나를 움켜쥐고 간장을 숟갈로 떠서 조금씩 뿌려가며 먹었다.



할머니와 고모들은 접시 여러 개에 만두를 담아 동네 어르신들이 찾아오면 한 접시 씩 나눠 주시고는 했다.



어떤 분은 그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오순도순 하시며 드시기도 했고 어떤 분은 집에 싸가기도 했다.



이 모든 그림이 참 정겹고 따뜻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내가 느끼는 정과 사랑의 언어는 유독 먹는 것과 큰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하다.



누군가가 내 앞에 전날 끓여 놓은 찌개를 재탕해서 내놓든, 냉동고에 있는 먹다 남은 피자를 다시 데워서 내놓든, 덜 익거나 조금 퍼진 라면을 내놓든, 재료가 남아서 샌드위치 하나를 더 만들었다며 퉁명스럽게 내놓든 이 모든 행위가 나에게는 따뜻한 메시지를 주는 느낌이다.



원래 남의 집밥이 더 맛있다고 하는데, 이 는 알게 모르게 (요리하고 차려서 내놓는 사람은 막상 정말 성가시고 귀찮았을 수 있지만) 남의 따뜻한 마음을 전달받아서 그럴 수도 있겠다.





프랜시스 아버지를 제외하고 모두 술기운에 얼굴이 울긋불긋했다. 말이 빠르신 프랜시스 삼촌들의 말이 느려지고 억양이 쳐진 걸 보니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추수감사절에는 두 어달 후 크리스마스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연말 잘 보내라는 인사말과 함께 헤어진다.



내가 마지막으로 프랜시스 가족과 함께한 식사는 2007년 추수감사절이다. 가능하다면 매년 캐나다로 돌아와 식사에 합류하겠다고는 했지만 전혀 이루어지질 않고 있다.



매년 10월과 12월 되면 유독 칠면조 생각이 많이 난다.



물론, 칠면조를 대단히 좋아해서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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