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컥! 아 씨... 누구야?!"
누군가 강한 등짝 스매싱을 갈기고 쏜살 같이 도망간다.
녀석은 쥐새끼 같이 잽싸고 작아서 따라잡기에는 무리였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굳이 전력을 다해 쫓아가 잡을 생각을 안 했다.
'푸치'라고 불리는 이 녀석은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다.
작은 키에 눈과 귀를 살짝 덮는 긴 머리에 구릿빛 피부, 전형적인 이탈리아 남부 출신처럼 생긴 아이였다.
자기 증조할아버지가 이탈리아 남부 출신 이민자라고 항상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다닌다.
어릴 때부터, 왠지 한국인과 이탈리아인은 잘 안 맞다고 느꼈다.
일종의 선입견이긴 하지만, 살짝 비슷한 성향을 갖고 있는 두 반도 국가다.
양은 냄비 마냥 확 달아오를 때도 있고, 복잡한 근현대사 등 이래저래 비슷한 구석이 있는 듯하다.
원래, 비슷하면 안 맞다고 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친한 이태리계 친구들도 있어서 크게 개의치 않는다.
푸치는 나와 직접적인 연결고리는 없었고 몇몇 친한 친구들이 푸치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녀서 잘 알고 있었다.
"야, 이 녀석 조심해야 해. 진짜 사람 성가시 게 구는 데는 도가 튼 놈이라서... 그런데, 나쁜 놈은 아니야. 장난이 심할 때도 있는데 의리도 있고 그래."
학년도 다르고 같은 수업을 듣는 것도 없어서 이 녀석과 나와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둘 다 피티와 상담을 한다라는 것이다.
학교에서 대형사고는 아니더라도 몇몇 선생님 말을 무지하게 안 듣고 감정기복이 제법 있는 편이어서 상담 대상자에 올랐던 거 같다.
몇몇 선생님과는 잘 지낸 반면에 어떤 선생님과는 철천지 원수를 진 사이만큼 안 좋은 관계였다.
푸치는 전반적으로 '살짝 불량하고 거슬리지만 악랄한 학생은 아니다'라는 이미지였다.
학교에 일이 있어서 늦게 하교하는 어느 날, 학생은 나 밖에 없었는데 학교 앞 운동장에 저 멀리 학생 하나가 보였다.
푸치였다.
"난 볼 일이 있어서 그렇다 치고... 넌 왜 아직까지 학교 밖에서 서성이냐?"
"그냥, 딱히 할 일 도 없고... 뭐 이런저런 생각한다고."
"그냥 집에 가서 뒹굴거리기나 하지 왜?"
"별로 집에 가고픈 생각이 안 드네. 넌 뭐 할 건데?"
"나? 봐서 '작업실'(당구장)이나 갈까 생각 중인데..."
그렇게 비생산적이고 목적 없는 대화를 시작으로 담배 몇 대를 태워가며 별의별 쓰잘데 없는 얘기를 한 시간은 족히 넘게 주고받았다. 서로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음악, 영화, 드라마, 책 등 시시껄렁한 얘기들로 시간을 보내버렸다.
문득 궁금했다.
"넌 피티랑 뭔 얘기하냐?"
"주로 가족 얘기를 많이 하는 거 같은데. 누나랑 부모님..."
"뭐 나랑 별반 차이는 없구나. 아, 나는 음악 얘기도 많이 해. 피티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내가 엄청 좋아하는 기타리스트거든."
"피티가 없었으면 난 학교 못 다닐 거야 아마."
"와... 그 정도로 피티가 좋냐?"
"유일하게 내 얘기를 진심, 진지하게 들어주는 분이라..."
"나도 지금 니 얘기 듣잖아. 하하."
"아니, 이 건 좀 다르지. 하하."
쬐끔하고 까불락 거리기만 할 줄 알았던 녀석인 줄 알았는데, 진중한 모습이 신기했다. 이런 면모도 있다니...
"푸치가 사고 하나를 쳤는데 정학 처리가 됐나 봐. 그나마 다행인 건 가볍게 3일짜리 정학이던데."
친구 하나가 점심시간 때 소식을 알렸다. 관계가 안 좋았던 선생님과 주먹다짐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바로 사과를 했지만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선생님은 이번엔 제대로 벌을 줄 생각이었나 보다.
점심을 대충 먹고 한 대 피우러 학교 정문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 푸치가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는 게 보았다.
뒷모습이 축 처져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금요일이니, 주말 포함 며칠 쉬고 있으면 발랄하게 돌아오겠지.'
월요일 아침, 학교에 등교했는데 분위기가 이상했다.
1교시 수업에 들어섰는데 많은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몇몇은 눈이 빨갛게 부어있었다.
"야, 다들 무슨 일이래?"
"하아... 푸치가..."
친구의 짧은 한 마디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 톤이 더 이상 설명을 안 해도 무슨 상황인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언제 그런 건데?"
"어젯밤에 바람 쐬러 나간다고 하고... 그런데 하필 푸치를 발견한 게, 어릴 적 소꿉친구가 공원에 개 산책 시키러 나왔는데..."
그 공원이 어딘지 안다. 큰 버드나무가 있는 공원.
그 버드나무가 푸치와 마지막을 함께한 것이다.
1교시 수업이 되는 둥 마는 둥, 선생님도 침통한 얼굴이었다.
"야, 우리 다 같이 공원에 가자!"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복도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누가 뭐라 하든, 많은 학생들이 1교시 수업을 마치고 공원으로 향했다.
다들 무단결석으로 처리되겠지만, 교장, 교감 선생님 포함해서 누구도 저지하지 않았다.
공원에 있는 버드나무 앞, 나무 밑에는 꽃들과 사진 몇 점이 이미 놓여 있었다.
버드나무 아래는 자그마한 추모공간으로 변해있었다.
누군가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모두 기도를 올렸다.
그날 오후 장례식장에 많은 학생과 선생님이 모였다.
슬퍼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사람들의 침통한 표정만큼 푸치는 알게 모르게 많은 정을 주고 간 게 분명했다.
마지막 작별인사를 위해 푸치가 안치되어 있는 관 앞으로 갔다.
푸치의 얼굴은 온전했고 그냥 편하게 잠들어있는 모습이었다.
이마에 손을 얹었다. 차디 찬 몸이었지만, 내 마음은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장례를 마치고 푸치의 누나와 부모님은 푸치의 사물함 정리를 위하여 학교를 방문했다. 나도 얼핏 보았는데 선생님들께 감사하다는 인사를 연신 드렸다.
나는 피티의 상담실을 찾았다.
상담실 안에 들어섰을 때 피티 자리 바로 밑 카펫 바닥은 흥건하게 젖어있었다. 눈물을 얼마나 쏟았으면 카펫이 저리 됐을까...
푸치는 우울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피티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없었고 도움이 못 되었다고 많이 자책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건 알고 있을 것이다. 다만 푸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는 안타까운 감정이 따라다녔다.
학교 앞 길바닥, 학교 친구들 한 무리가 다들 털썩 앉아 담배 하나씩 물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었다.
푸치와의 추억들이다.
다들 웃다가, 침묵했다가, 눈물을 잠시 찔끔거렸다가, 또다시 웃기를 반복하며 이야기를 이어 나아갔다.
마지막에 어느 한 녀석이 엔딩을 장식했다.
"You know what guys? Pucci had big balls. They were probably big as my fist."
(얘들아, 그런데 그 거 알아? 푸치의 불알은 아마 내 주먹만큼이나 컸을 걸?)
*용감하다는 표현을 격하게 한 것이다.
"You're right. They probably were."
(그래 네 말이 맞아. 아마 그랬을 거야.)
스스로의 목숨을 앗아 가는 게 용감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거나, 여전히, 부디 편안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