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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쪽짜리 독립

by 이삼오

늦은 밤, 스테레오에 헤드폰을 연결한다.



오늘의 자장가는 판테라의 "Vulgar Display of Power" 앨범이다.



엄청나게 강력한 메탈사운드의 앨범이지만 거실과 안방을 누비며 싸움을 해대는 부모의 사운드에는 살짝 못 미칠 듯하다.



메탈이 좋아서 듣는 것도 있지만 거의 격일로 싸워대는, 나와 동생에 대한 배려는 이미 개 한 테나 줘 버린 지 수년이 흘렀으니... 귀에 헤드폰이라도 끼고 메탈을 켜면 저놈의 듣기 싫은 소리를 안 들어도 된다.



그래도 가끔 뭘로 싸우는지 궁금해서 헤드폰을 안 낄 때도 있다.



그냥, 둘이 성격이 지랄 맞게 안 맞는다.



아버지도 이상한 사람이고 어머니도 정상이라고 보기 어려운 캐릭터이니, 뭐 불 보듯 뻔하다.



싸우는 거는 그렇다 쳐도 냉기가 감도는 집안 분위기는 정말 견디기 어렵다.



어려서부터 학교에 있으면 다른 아이들이 "아, 빨리 집에 가고 싶다"를 연발한다.



나로서는 이해 불가였다. 맨날 어떻게 하면 집에 안 갈 수 있을까를 궁리하던 나였고, 여러 꼼수와 잔머리로 어떻게든 집에 있는 시간을 줄였다.



그러나, 잠은 해결해야 하니 맨날 늦게 기어들어가 듯 집으로 왔다.



"넌 맨날 늦게 오냐!"



아버지가 쏘아붙인다.



"그럼 일찍 오고 싶겠나?!"



받아친다.



"뭐야 이 새꺄?!"



방으로 직행한다.



동생이 내 방으로 들어와 재잘거리기 시작한다. 눈빛을 보아하니 집에서 1라운드가 끝나고 휴전 중 인 듯했다.



참혹했던 1라운드 상황을 보고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무렇지 않은 일상 이야기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놀이터에서 뭐 하며 놀았는지, 숙제가 늘어서 힘들다는 둥...




(아버지와 어느 식당, 아주 가끔 둘이 밖에서 밥을 먹는다.)



"왜 아무 말이 없냐?"



"......."



그냥 아무 말 없이 샐러드를 입에 한 입 가득 가져가고 씹는 동안 닭다리 살을 나이프로 야무지게 썬다.



거의 다 먹었을 때쯤 입을 열었다.



"나, 집에서 나가서 살래요. 스트레스 때문에 도저히 있기 어렵네..."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물어본다.



"어디서 살려고?"



"테리 형님 집이요."



대답은 없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실은, 이미 계획이 다 있었다.



테리 형님네 자주 놀러 가기도 했고, 형님은 종종 내 얘기를 들으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잘 곳만 필요하다면 언제든 오라며 그랬다.



그냥 잘 곳, 씻을 곳만 있으면 됐다.





마트 쇼핑 카트를 잠시 빌리기로 했다.



내 짐이라 해봐야 옷 몇 가지와, 작은 스테레오, 기타, CD 몇 개가 전부라서 카트 하나로 충분했다.



테리 형님 집은 우리 집에서 불과 걸어서 5분 거리이다.



나는 쇼핑 카트를 끌고 아버지는 내 가방 몇 개를 들고 테리 형님 집으로 향했다.



참, 골 때리는 상황이다.



멀쩡한 집이 있는 곳에서 자빠지면 코 앞인 곳으로 임시 이사를 하고 있으니, 그것도 부모 싸움 스트레스로...



아버지가 테리 형님 집에 가는 걸 허락한 이유는 아마 평소에 형님을 굉장히 좋게 봐와서 그랬을 것이다.



원래 내 친구들을 심히 경계하거나 싫어하거나 둘 중 하나인데 유이하게 프랜시스와 테리 형님은 아주 좋게 봤다. 내가 뭘 하든 어디에 가든 이 둘이 연관되어 있으면 무조건 오케이였다.



허락을 하든 안 하든 난 나갈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그 걸 알았는지 그냥 쿨하게 보내주는 거 같았다.



그래도, 부모가 문제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면, 문제부터 해결하려고 해야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아니면,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일까. 결국 문제를 해결하려고 서로 입을 열었지만 더 큰 문제로 이어지는 상황이 아니었을까.



내가 괜히 쫓기듯 나가는 기분도 들었다.





테리 형님 집은 일반 주택에 지하를 쓰고 있었다. 출입문도 따로 있고 윗 집 간섭을 받을 일이 없었다. 다만 세탁실이 지하에 있기 때문에 윗 집 세대가 빨래를 하기 위해 가끔 내려오곤 했다.



꽤 넓은 지하로 내려가서 왼쪽 문을 열면 테리 형님의 공간, 오른쪽은 룸메이트의 집이었다.



형님의 구역으로 더 들어가면 창고 비슷하게 쓰던 공간이 있었는데, 이곳이 내가 잠을 잘 곳이었다.



두꺼운 카펫 바닥 위에 베개와 침낭을 깔아놓으니 제법 그럴싸했다.



머리맡에 스테레오와 CD가 들어있는 상자를 놓았다. 내 잠자리 세팅은 그렇게 끝.



"형님, 고마워요. 그런데 그렇게 길게 있지는 않을 거예요."



"난 상관없으니까 너 편할 대로 해."



자리에 누웠다. 쥐 죽은 듯 조용했다.



헤드폰을 꼽고 메탈이 아닌 카를로스 산타나의 신보 "Supernatural"을 틀었다.



산타나의 기타 소리는 뭔가 힐링되는 기분이 들게 한다.



낯선 천장을 뚫어져라 보며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이게 뭐 하는 건지...



문득 자주 하는 생각이 또 떠오른다.




'엄마는 뭐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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