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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보너부리 Jun 02. 2023

너의 이별을 준비해주고 싶어서 2

<나는 죽음이에요.>를 읽고

사람은 죽어 영혼이 되면 어딘가에 도착한다. 살아 있는 사람도, 떠난 사람도. 아마 각자의 공간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공허함을 딛고 매일을 산다. 죽음에 대해 내가 가진 기본 생각이다. 


매주 교회에 다니던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더 이상 교회에 가지 않게 되었다. 열두 살이 갓 된 내가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마음을 달래려고 새로운 교회, 천주교,  불교, 그 외에 각종 종교와 관련된 책을 읽고, 종교 지도자를 직접 찾아가 만나보기도 했다. 참, 건방진 10대였다. 그 많은 사람을 만났음에도 마음은 열리지 않았고,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오래 다니던 교회와 절에 다니시던 할머니의 영향을 참 크게 받았다. 사후세계는 그냥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일종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아이들은 종교를 실제적으로 접해 본 적이 없다. 첫째는 즐겨보는 책에서 기독교, 불교, 힌두교, 이슬람교의 신과 기본 교리를 읽었다. 관광지로 유명한 성당이나 절에는 수시로 간다.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도 주변에 많다. 하지만 신에 대해서나 종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다.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생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감정과 그리움은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이빨 요정이 뭐야'라는 질문 뒤에
'죽음이 무엇이냐'는 딸의 질문에
갑작스러운 공격을 받은 것처럼  전혀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잠시 종교의 말씀들을 빌릴까 했지만 설명하기도, 설득하기도 어렵다. 아이에게도 점차 수많은 이별이 다가올 것이다. 가까운 사람의, 조금은 먼 사람의, 때로는 타인의 죽음으로 마음이 멍들고 그 마음을 회복하느라 온 에너지를 쓸 것이다. 생기를 찾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죽음을 직시한 후,  옳다고 믿었던 가치관이, 사랑하는 자신의 삶이 통째로 흔들릴 수도 있다. 생채기를 준 만남과 이별이라도, 상대방이 지구에서 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엄마, 죽음이 자전거를 타고 와?"


"그러네."


진짜 자전거를 타고 오면 얼마나 좋을까? 죽음은 저렇게 천천히 내가 확인할 수 있는 속도로 오지는  않지.


'나는 죽음이에요.'라고 자신을 담담하게 소개하는 죽음은 다정하고 곱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더욱 힘껏 두드릴 것이고, 누구도 자신을 피해 숨을 수는 없다고 말한다. 자신이 있어야 생명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단다. 삶과 자신은 하나이며, 자신이 두렵다면 사랑을 떠올리라고 우리에게 조언한다.


아이가 마주하게 될 가장 아픈 죽음은 역시 나의 죽음일까? '죽음'을 생각하며 오히려 '사랑'을 깨닫는다. 나의 죽음보다 아이들이 나를 잃는 것이 더 두렵다. 내가 떠난 후에도 아이들의 삶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찰 수 있다면. 이 바람만으로도  나의 '삶' 안에서 정말 많은 것들을 또 견딜 수 있겠다.


"엄마도 죽는 건 무섭지만, 세상에 모든 것들은 태어났고,
그리고 언젠가는 떠나. 
곁에 누군가가 떠나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사랑했는지 기억하자.
생김새나 목소리는 잊어도 돼. 보고 싶어서 울어도 돼.
하지만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사랑하자.
 시간이 조금 흐른 다음에는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춤도 추는 거야.
손가락 걸어! 약속!" 

 


삶의 끝에 죽음이 기다린다고 생각했다. 서로 가까이 눈에 보이는 곳에 늘 함께 하는 사이. 삶과 죽음. 

내가 떠난 뒤에 아이들이 많이 아프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를 생각하며 하늘이 맑고, 바람이 시원하게 부는 날을 떠올리면 좋겠다. 편안한 죽음이든, 아픈 죽음이든. 나의 죽음이 언젠가는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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