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도깨비를 빨아버린 우리 엄마'를 읽고
5월이 되었습니다. 날씨는 포근해지고, 학기 초의 긴장감도 점차 풀립니다. 학교마다 체육대회, 소풍 등 다양한 행사로 들썩이고, 어린이날과 어버이날, 스승의날까지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답게 바쁜 한 달이 시작됩니다. 두 명의 교사와 두 아이가 사는 저희 집은 특히 분주합니다. 거기에 가족 중 두 명의 생일까지 있어, 우리 가족에게 5월은 연중 가장 행사가 많은 달입니다.
저 역시 '가정의 달'을 주제로 한 독서 행사를 준비하며 정신없이 지냈습니다. 가족 독서 인증 사진 찍기, ‘한 가족 한 권 읽기’ 등 학생들과 부모가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했습니다.
밖에서는 체험 활동 일정을 조율하고, 집안에서는 유치원과 학교 공개수업 날짜를 맞춰야 합니다.
교사이자 엄마이다 보니 근무하는 학교 일정과 아이들 기관 일정이 겹치는 경우가 잦고, 아이들이 참석해 주길 바라는 행사에 빠지는 일도 생깁니다. 작년에 두 아이 모두 서운해했던 기억이 있어, 올해는 유치원은 엄마가, 초등학교는 아빠가 각각 공개수업에 다녀왔습니다.
학교에서의 저는 학생들에게 자신의 삶의 가치와 의미를 고민하자고 말합니다. 하지만 집에서는 ‘이불 김밥’이 되어 아이들과 뒹구는 엄마입니다. 공개수업에서 본 아이들의 모습도 집에서와는 사뭇 다릅니다. 늘 개구쟁이 같던 두 녀석이 학교에선 무척 조용하더군요.
그래서였을까요. 그날, 남편과 저는 서로 다른 걱정을 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들이 각자의 방식대로 잘 자라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부모의 눈에는 부족해 보이는 부분, 더 채워주고 싶은 부분들이 보이기 마련이니까요. 이 아이들은 커서 어떤 일을 하게 될까?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만나게 될까? 우리는 부모로서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그 즈음, 둘째의 유치원에서 한 통의 안내문이 도착했습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아래 책을 읽고, 독서활동을 가족들과 함께 해주세요!”
책 제목은 『도깨비를 빨아버린 엄마』입니다.
처음엔 그림체가 낯설고 오래된 느낌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평상 시의 저라면 구입하지 않았을 책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면서 점차 '이거다!'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책은 빨래를 좋아하는 엄마의 이야기입니다. 빨래를 너무 좋아해 커튼, 바지, 이불은 물론 빨래거리가 다 떨어지면, 고양이, 개, 구두, 슬리퍼, 아이들까지 닥치는 대로 빨아버리는 엄마. 결국엔 천둥번개 도깨비까지 씻어버리고, 심지어 도깨비 친구들이 몰려와도 “좋아, 나에게 맡겨!”라고 말하는 엄마.
이 씩씩하고 긍정적인 엄마의 모습은 웃음을 넘어 존경심까지 들게 했습니다. 아이들은 빨래줄에 널린 각종 동물들, 아이들, 물건들, 도깨비들을 보며 재밌어하며 웃었지만, 저는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지치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들과의 놀이 시간을 자꾸 회피하고, 자주 한숨 쉬는 제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엄마의 모습이었으니까요.
유치원에서 제시한 질문은 단순했습니다.
이 엄마처럼 마주한 모든 것을 빨아버릴 만큼 좋아하는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있나? 아니, 저에게는요? 남편과 저는 책 읽기와 드라마 보기를 좋아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학교 일도 좋아합니다. 서로를 아끼고 지지해주는 가족입니다. 하지만 이 책 속 엄마처럼, 몸이 먼저 움직이는 그런 열정을 가진 일이 있을까요?
둘째에게 물어봤습니다.
“좋아하는 일이 뭐야?”
“엄마랑 아빠를 좋아해. 누나는… 가끔.”
질문 의도를 잘 모르는 듯해 다시 설명했습니다.
사실 이 질문을 아이들의 진로나 직업과 관련된 일과 연관지을까도 고민했지만, 빨래 하는 엄마의 그 신나는 마음은 일로서의 직업과는 다릅니다. 그 설레는 감정을 아이들이 느끼기를 바랐습니다.
“이야기 속 엄마는 '빨래하기'를 정말 좋아하잖아. 그런 것처럼 너는 어떤 행동을 할 때 가장 신나?”
열두 살 누나가 거들어 줍니다.
“일! 행동! 먹고, 뛰고, 나는 거처럼 몸으로 하는 거!”
여섯 살인 둘째는 명사와 동사의 차이를 아직 잘 모르니 말보다 예시가 필요한 순간이었습니다. 잠시 고민하더니 둘째가 대답했습니다.
“영화 보는 거. 티비 보는 거. 토이스토리 계속 보기!”
그렇습니다. 꼼짝 않고 영화를 보는 시간이 단순히 화면을 보는 시간이 아니라는 걸 저도 압니다. 노래를 따라 부르고, 새로운 단어를 익히고, 등장 인물의 표정과 대사를 기억하는 그 몰입의 순간을 좋아하는 것이겠지요.
“나는 친구들이랑 노는 거.”
동생이 생긴 이후로 양보와 배려를 많이 해야 했던 첫째. 코로나와 어린 동생으로 초등학교 저학년을 거의 집에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여전히 '노는 게 제일 좋은' 아이가 살아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등산하기."
아이들의 할머니, 시어머니는 산을 좋아하십니다. 70대가 넘은 지금도 전국의 산을 두 다리로 누비십니다. 그리고 산에 가시면 근처 절에 들러 항상 가족의 안위와 행복을 비십니다.
"엄마는 춤 추는 게 제일 좋아! 제일 행복해!."
그리고 저는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했습니다. 아니 좋아합니다. 어릴 적부터 체력은 약했지만, 음악만 나오면 몸이 먼저 반응하던 아이였어요. 클래식이든 대중가요든, 벨리댄스 음악이든,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던 기억이 선명합니다. 노래도 좋아해서, 한때는 뮤지컬 배우를 꿈꾸었고, 20대엔 댄스 학원에 꾸준히 다니며 1:1 레슨까지 받았지요. 아무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소중한 기억입니다.
아이를 낳은 후로는 춤을 거의 춘 적이 없습니다. 엄마가 되고 나서는 아이들의 일정을 챙기고, 아이들을 위한 시간이 당연히 우선 순위였습니다. 나를 위한 시간과 공간을 내려놓는 것이 엄마의 역할에 적응하는 데 가장 빠른 방법이었습니다.
"아빠는 그림 보기!"
"아빠 내가 그린 그림도 봤잖아! "
남편 역시 전시관에 가서 그림을 보는 걸 무척 좋아하지만, 아이들이 생긴 이후로는 1년에 한두 번 가기도 쉽지 않습니다. 고흐나 모네의 그림은 딸을 데려가기도 하지만, 미술의 소재는 어두운 면을 다룰 때도 많아 가족과 함께가 늘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지금은 하지 못하더라도 좋아하는 일을 즐기는 순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잊지 말자고요. 그리고 그 순간에 함께 하지 못하더라도 가족의 그 순간을 존중해주자. 언젠가 다시 시작할 수 있게 응원해 주자구요!
그것이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방식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