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 '사계절'을 읽고
주말 산책을 나서면 어느새 남편은 멀찍이 떨어져 있고, 아이들과 저는 조금 앞장서 걸을 때가 있습니다. 남편은 요즘 식물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산책을 하다 가로수나 아파트 앞에 핀 작은 풀꽃을 보면 아이들에게 "이건 개망초야", "저건 냉이꽃이야" 하고 일일이 설명도 해 줍니다. 잘 모르는 꽃이 나오면, 부족한 듯, 식물 사진 어플을 켜서 찍고, 이름을 알아낸 뒤, 자라는 환경과 특징을 찾아보고 설명하려 애씁니다. 그 모습은 다정하다기보다는 과학 수업 같습니다.
종종 그런 모습을 보며 '잘난 척이야.' 하고 웃게 되지만, 덕분에 저도 전에는 관심 없던 것들에 눈길을 주게 됩니다. 환경에 조금 둔감한 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그저 큰 온도의 변화들로만 인식했었는데, 남편과 살면서 각 생명들이 사계절을 품어내기 위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어떻게 공생하고 있는지 알게 됩니다. 결국 사람은 사람과 만나 배운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끼는 것들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니까요.
마침 6월 첫째 주는 환경주간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담당자로서 환경주간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저도 담임을 맡고 있는 학급에 환경 게시물을 게시합니다. 첫째는 학교 창체 시간에 활동을 하고, 둘째는 유치원에서 환경을 위해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을 배웠습니다. 온 집안의 전기 코드를 뽑고 불을 끄는 모습이 제법 진지합니다. 우리는 각자 다른 자리에서, 같은 주제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셈입니다.
매주 일요일(2주에 한 번 일 때도 있지만)에 그림책을 함께 읽기 시작한 뒤, 첫째는 자기가 읽고 싶은 그림책을 추천합니다. 토요일이 되면 " 이번 주는 그림책 읽을 거야?"라고 질문도 합니다. 책을 읽으며, 평소엔 꺼내기 어려웠던 이야기들도 자연스럽게 나누게 되고, 서로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며 조금씩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딸은 학교에서 재미있는 활동을 했다며, "사계절이 담긴 그림책을 찾아보자" 하더군요. 원래 읽으려던 책을 미루고, 책장을 뒤져 그림책 두 권을 찾아냈습니다. 키즈엠의 <사계절>과 창비의 <숲 속 재봉사의 옷장>입니다. 글밥이 작은 사계절은 소리 내어 읽고, 숲 속 재봉사의 옷장은 넘겨 보며 계절에 피는 꽃들을 찬찬히 살펴보았습니다.
<사계절>은 숲 속 중앙에 커다란 나무가 있는 마을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 나무의 구멍에는 부엉이가 삽니다.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나무를 중심으로 사계절이 흐르고, 동물들과 식물들의 일상이 바뀝니다. 봄에서 여름으로 그리고 가을로 겨울로, 그리고 다시 봄으로, 그 흐름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주변과 시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책을 다 읽고 난 뒤, 가족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우리는 계절이 바뀌는 걸 어떻게 알까?"
아빠는 기온 변화로, 첫째는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저는 계절별 간식으로 알아챈다고 했습니다. 각자의 시선으로 계절을 느끼는 방식이 참 다릅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아이들은 당연히 수박과 참외 포도를 실컷 먹을 수 있는 여름입니다. 영하로 떨어져야 딱 좋은 온도라고 말하는 남편은 스노보드를 즐길 수 있는 겨울을, 저는 온 세상이 알록달록한 봄을 가장 좋아한다고 답했습니다. 꽃이 피고 새싹이 돋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니까요.
아이들과 함께 가족사진을 보며 계절을 추측해 보는 활동을 했습니다. 겨울 바다에서 패딩을 입고 찍은 사진, 붉은 단풍 앞에서 찍은 가을 사진, 노란 개나리 앞의 봄 사진.
"이때 엄마는 갈매기 무서워 도망갔지?"
"이때 가을이잖아? 아냐? 산이 빨가니까. 봄이지!"
서로의 기억이 엇갈리고, 추측이 오갑니다. 코로나 시기에 태어난 둘째는 첫째에 비해 가족 여행의 경험이 적지만, 사진을 통해 그 시간에 머물던 우리의 표정, 대화, 감정들을 함께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기억은 참 묘한 힘이 있어서, 단 한 장의 사진만으로도 사라졌던 계절의 냄새와 감정들을 다시 불러오곤 합니다. 그림책을 읽고 나누는 대화에, 사진 한 장, 한 장이 더해지자 기억이 더 풍성해졌습니다.
이야기 도중 둘째는 계절이 따로따로 존재한다고 느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곗바늘처럼 단절된 시간 속에서 살다 보면 계절의 흐름을 잊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사계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시간은 끊긴 것이 아니라 이어지고 있고, 자연은 쉬지 않고, 계속 순환하고 있다고요.
그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요. 가족의 대화를 통해 둘째도 다른 가족들도 또 새로운 것을 배워나갑니다.
https://seasonsinthemuseum.com/
딸이 학교 수업 시간에 활용했던 ‘정원의 시간들’이라는 사이트를 우리 가족도 함께 사용해 보았습니다. 계절마다 꽃과 나무, 돌, 연못 등을 배치해 우리만의 사계절 정원을 꾸미는 활동인데, 정원을 디자인하면 계절별로 달라지는 모습이 3D로 구현됩니다.
꽃이 피고 지는 색의 변화에 따라 정원은 계절마다 전혀 다른 표정을 지었습니다. 풍성했다가 쓸쓸해지고, 계절이 그려내는 그림입니다.
엄마와 딸은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을 살려 다채로운 꽃과 나무들을 풍성하게 배치했고, 아빠와 아들은 단단하고 정갈한 구조로 균형 잡힌 정원을 완성했습니다. 서로 다른 감각과 취향이 만나니, 그야말로 우리 가족만의 개성이 물씬 풍기는 정원이 되었습니다.
다른 듯 닮은 네 사람의 개성이, 하나의 정원 안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본인들이 만든 정원을 서로 소개하고, 우리는 작은 약속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동네에도, 우리가 사는 이 삶 속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고 계절은 지나가고 있다는 걸 새삼 느낍니다. 계절을 함께 한다는 것은, 결국 삶의 흐름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고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요?
한 계절, 또 한 계절을 지나며 우리가 함께 남기는 기억들은, 사계절의 변화만큼이나 아름답게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나의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현재의 순간을 누릴 줄 아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 어떤 계절이든, 우리가 함께했던 기억들이 따뜻한 빛으로 남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