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제목을 지으면서 혼자 피식 웃었다.
미술과 신문배달이 어떤 관계가 있을까?
솔직히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난 사건인지는 가물가물하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 3학년 때 있었던 일인 거 같다.
그 당시 아빠는 새벽에 나를 깨워서 아침 운동을 했다.
그때는 공부를 해야 하는 오빠와 너무 어린 여동생을 패스하고 내가 만만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지나고 나서 지금 생각해보니 일찍이 비만 유전자를 알아보신 아빠의 특단의 조치였던 것 같다.
그 당시 우리 집은 대구 남구 봉덕동 중에서도 봉덕2동에 살고 있을 때다.
지역 사람들이 너는 어디 사니?라고 물으면 그 당시 대부분의 동네 친구들의 대답은
'성도교회 뒤에 살아요.'라고 말했다.
성도 교회 뒤에 살았던 우리.
그 집으로 이사 가면서부터 가세가 기울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당시 아빠는 엄마가 장사를 하겠다고 해서 식당을 차려주면서 처음으로 전셋집으로 이사를 갔었다. 물론 'ㄱ' 자 집의 전부를 우리가 쓴 것은 아니었다.
미용실을 하는 젊은 부부에게 문간방을 세주고 살았다. 한지붕 두 가구의 형태가 되었다.
그곳에서 아빠는 매일마다 그 집에서 앞산 초입까지 산책을 하셨는데 그때마다 나를 깨웠다.
서울 억양으로 '성자야~~'하고 부드럽게 부르시면 벌떡 일어났던 나.
아빠와 함께 새벽길을 걸으면서 나는 신기한 광경을 보았다.
"아빠야. 저 사람들은 누군데?"
"응. 고학생이야. 신문을 돌려 돈을 버는 고학생"
그때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신문을 돌리면 고학생이라고.
"학생인데 돈을 벌어?"
"아빠가 없거나. 엄마가 없어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라서 직접 돈을 버는 거지."
"얼마 주는데?"
"몰라. 한 이만 원 정도 주겠지"
그런 일을 겪고 난 뒤, 학교에서는 사생대회가 열렸다.
솔직히 그 당시 나의 꿈은 화가였다. 친구들이 인형놀이를 할 때 20원을 주고 두꺼운 도화지에 두 명의 여자아이와 각종 옷들이 그려져 있는 그것을 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오려서 그것으로 인형놀이를 했는데 그때 나는 그것을 사지 않고 직접 그렸다.
친구가 산 인형놀이 도화지를 앞에 두고 빈 도화지에다가 그것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것이 나의 특기였고
그것 때문에 친구들은 우리 집으로 찾아와 빈 도화지를 내밀며 그려달라고 했었다.
봉덕동에 위치한 봉덕초등학교의 사생대회는 항상 학교 뒷동산에서 이뤄졌다.
뻔하게 보이는 학교 운동장이나 뒷산을 그리는 것이 관례였었고, 나는 그런 사생 대화 날이 마치 소풍처럼 즐거웠다. 나의 특기를 전교생에게 뽐내는 일 아닌가!
그러나 나의 설렘과 기대가 한 번에 무너지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우리 반 학생 중에 나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친구가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 옆에서 내 그림을 구경하던 친구들이 그 친구 옆으로 몰리게 되면서 나는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쟤가 성자 보다 잘 그리는 거 맞제?"
"당연하지. 자는 보라매 미술학원 다닌다 아이가!"
보라매 미술학원은 봉덕시장 근처에 있는 그 당시 꽤 핫한 미술학원이었다.
그 당시의 사설 학원의 종류는 웅변학원, 주산 학원, 미술학원, 태권도 학원이었다.
그 학원들도 어느 정도 먹고사는 집만 다니던 학원이었는데. 우리 집의 장남인 오빠는 혼자 두 군데 학원을 다녔다. 태권도 학원과 주산 학원. 왜? 장남은 우리 집에서 귀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다 필요없고, 우리집의 모든 특혜는 오빠였고, 오빠가 받는 특혜를 나도! 라며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은 상상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날 때부터 그런 말도 안되는 룰에 적응해 있었다.
학원비를 알아본 나는 그 학원 한 달 수강료가 18.000원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때 문득 고학생이란 단어가 떠 올랐다.
'그래 나도 고학생이 되자!'
나는 학교가 끝나고 동네에 있던 신문 보급소로 향했다.
그리고 신문배달을 시켜달라고 했다.
그때 그분은 내일 다시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날을 기다렸고, 다음날이 되어 신문보급소를 찾아가니 당장 내일부터 나오라는 말을 한다. 뛸 듯이 기뻤다. 그 당시 3학년이었던 내가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 일인가!
이제 다음 달부터 나도 미술학원을 다닐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설레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새벽 4시,
아빠가 나에게 '성자야~'하고 부르면 자는 척하고는 아빠가 아침 운동을 나가고 난 뒤에 일어나 보급소로 달려갔다.
배달할 집을 가르쳐 주던 총무님은 분필 하나를 들고 다니시면서 집집마다 분필로 표시를 해줬다.
그리고 한부당 백 원. 200부의 신문을 돌리면 내게 이만 원의 돈이 생겼다.
분필로 표시하는 것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정상적인 집, 하나는 동의 없이 넣는 집.
당시 신문은 그랬다. 그냥 막 집어넣고는 돈 달라고 떼쓰는 그런 강매가 성행했었고, 그러다 보니
신문을 집어넣으면 욕을 먹는 일도 왕왕 있었다.
한 사일을 그렇게 총무님과 함께 다니다가 오일째부터는 혼자 신문을 돌려야했다.
아마도 내가 글을 쓰는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시초는 바로 이 신문 배달에서부터였다고 생각한다.
이유는 신문을 돌리는 그 순간이 내게는 상상소설을 쓰는 순간이었다.
조경이 잘된 집의 나무는 램프의 요정에 나오는 지니 같았고, 불투입지에 신문을 넣었을 때 소리 지르는 집주인들의 대사는 캐릭터마다 틀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이 새끼야 너 거기 안 서!"
"넣지 마라고 했잖아!"
"나 돈 못준다."
"너 이 쥐새끼 같은 놈 당장 거기 서!"
골목 안 집들은 무서웠고, 나무가 많은 집도 무서웠고, 어떤 날에는 달이 무섭기도 했었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상상을 했다. 그리고 꼭 무서운 일만 있지는 않았다. 미군부대가 근처였던 봉덕동, 그리고 외외로 부자동네였던 봉덕동에는 새벽에 신문을 돌리는 고학생들의 신물을 팔아주거나 용돈을 주는 외국인들이 많았기에
몇백 원의 수입이 생기기도 했다.
한 달이 되고 이만 원의 돈을 받아 들고는 학원으로 가서 학원을 수강했다.
남는 돈 이천 원으로 4B연필과 도화지를 샀고. 매일 저녁 미술학원을 다니게 된 나.
그러나 보라매 미술학원에서의 수강은 한 달로 끝냈었다.
이유는 미술학원에서 사야 할 물감과 팔레트 들의 가격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더 이상 미술학원을 다니고 싶어지지 않았다. 한 달 열심히 벌어서 그 돈을 미술학원에 홀라당 바쳐야 하는 게 아깝기도 했었다.
이쯤 되면 사람들은 꼭 같은 질문을 한다.
아빠가 정말 모르셨냐고.
왜 몰랐겠는가! 신문보급소에서는 아빠에게 전화를 했었다
"거기 둘째가 신문배달시켜달라고 연락이 왔는데 대대장님께서 알고 계셔야 할거 같아서요. 어쩔까요?"
라고 온 전화에 아빠는 시키라고 했다. 그리고 매일 새벽 나의 뒤를 쫓아다니시면서 내가 잘하고 있나, 내가 위험하지는 않나 보셨던 것이다.
아빠는 예비군 대대장이셨다. 그리고 열 통장이었고, 그 동네의 토박이셨고 복덕방을 하셨기 때문에 그 동네 주민들은 내가 누구 집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건 아빠가 유명해서가 아니라 그 당시에는 모든 사람들이 다 그랬던 것 같다.
이 신문배달이 우리 집의 인생에 많은 변화를 가지고 왔다.
내가 교통사고가 나게 되자 아빠는 나 대신 신문을 돌리셨고 그러면서 신문지국을 운영하시기까지 하셨고, 그리고 아빠의 그 신문배달이 돌아가시기 십 년 전까지 이어졌다.
미술학원을 등록하기 위해 시작한 신문배달이 교통사고로 그만두게 되고 나서 내가 다시 새벽에 일어나게 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당시 나는 경북여상으로 진로를 정해야 했지만 내게는 경북예고 미술부의 일 년 장학금이란 특혜가 있었다.
경북여상과 경북예고는 내가 다니던 경일여중과 같은 재단이었고, 경북예고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상을 탄 학생은 경북예고의 장학금 지원이 있었다.
그랬기에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진학 원서를 써야 할 그 시기에 매일 밤 아빠에게 졸랐다.
"아빠야. 나 예고 가고 싶다. 내 꿈은 화가라니까! 화가! 내 예고 가게 해도~~"
"너 거기가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 데인 줄 알긴 해? 미술은 돈 있는 집에서나 하는 거야!"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경북여상 앞에 있던 주산,부기,타자학원의 원장님이 사촌오빠였다. 즉 내가 여상을 가면 학원비는 공짜라는 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가 새벽에 나를 깨운다
"성자야~~~"
벌떡 일어난 내가 물었다.
"아빠 왜?"
"오늘 전단지가 있는 날인데 와서 좀 도와줄래?"
그 당시의 신문보급소의 부수입은 전단지 배포였다. 찌라시라 불리는 광고지를 신문안에 삽입하고 나서야 신문을 돌리는데, 매일 돌려야 하는 자신의 할당량 안에 전단지를 끼워 넣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한 시간 일찍 일어나서 나가야 한다.
아빠의 부탁에 새벽에 일어나 아빠 따라 신문보급소에 간 나는 보급소 안에 책상 위에 쌓여있는 신문지 안에 전단지를 삽입했다.
거기 있던 어른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누군데. 국민학교 3학년부터 신문을 돌렸는데.... 이 정도는 껌이지 하며 잔뜩 어깨에 힘이 들어간 나.
골무를 오른쪽 엄지와 검지에 끼고 나는 빠른 속도로 전단지를 삽입했다.
할당된 전단지를 모두 삽입하고 나서 아빠의 신문배달을 도와드리기 위해 아빠의 자전거 뒷자리에 올랐다.
신문을 던지는 것에도 요령이라는 것이 있었다. 바닥 치기와 대문 위 공간에 끼워넣기. 혹은 어떤 집은 담 위로 넣기 등 대문의 형태와 그 집의 구조에 따라 신문을 넣는 방법도 달랐다.
그 당시만 해도 대문위에 작은 사각 화단이 있는 집들이 많았기에 잘못던져서 대문위 화단으로 던져지게 하면 사고가 되어 버린다. 그렇기에 반 접어서 탁치며 정확한 장소에 신문을 넣는 일.
지금으로 치면 생활의 달인감 아니었는가!
한참 아빠를 도와 일을 하고 있는데, 아빠가 말한다.
"자야. 니가 예고가 그렇게 가고 싶으면 가라. 아빠가 좀 더 열심히 돈 벌면 되지."
순간 나는 기쁘지가 않았다.
새벽마다 일어나 신문을 돌리는. 당시 예순이 넘으신 아버지
그때만 해도 남자 나이 예순은 할아버지였다.
난 그때 기쁘게 '응'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 말의 무게를 어린 내가 알아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나의 진학에 대해 궁금했던 담임 선생님에게 여상 갈게요.라고 말해버렸다.
그것으로 나의 진학은 도전보다는 포기라는 단어를 알게 해주었다.
당시만 해도 대구의 경북여상은 대구여상, 제일여상과 함께 꽤 괜찮은 여상이었다.
그 학교에 떨어지면 인문계는 자동으로 들어갈 정도로 커트라인이 높았던 여상이었다.
그리고 그때 생각했다. 여상 가서 공부 열심히 해서 은행에 취직해야지.
그게 그 시절 가난한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바라는 가장 옳은 길이었다.
나의 신문배달은 내게 미술학원이라는 단꿈을 맛보게 해 주었고
아버지의 신문배달은 내게 예고 진학 포기라는 현실 자각 타임을 만들어 주었다.
훗날 친구들이 내가 작가가 되었다고 할 때마다 한 말은
"난 니가 화가가 될 줄 알았는데~ 우째 작가가 되었노?"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가난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