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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레인베이글 Jan 13. 2019

아빠가 미안해

사건은 어젯밤에 일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인 큰애가 "아빠 핸드폰 잠깐만 하면 안 돼?"하고 묻기에 흔쾌히 "그래" 했다. 그때가 9시 30분쯤 됐을까. 10시 20분이 넘어가는 데도 닫은 방문이 열릴 기미가 안 보이자 살짝 짜증이 났다. "**야 이제 씻어"

"응 이것까지만~" 다시 20분 가까이 기다렸는데도 감감무소식. 방문을 덜컥 열고 "**야 이제 씻으라니까. 너 또 늦으면 짜증내고 그럴거면서" 하고 쏘아붙였다. 아침형 인간인 **는 이미 때를 놓쳐 뭉기적뭉기적 온 몸을 비틀며 짜증을 냈다. "이것 봐. 그니까 아빠가 씻으라고 했잖아!" **는 울먹거리며 말했다. "씻기 싫어~."


화를 억누르고 "그래 **야. 그럼 내일 씻어. 하루 안 씻는다고 어떻게 안 돼. 아빠는 3일 연속 안 씻은 적도 있어"하고 달랬다.


"응, 진짜? 아빠도 그랬어? 그럼 낼 일찍 일어나 씻을게"하고 말했으면 쉽게 끝났을 것을 **는 더 심하게 울먹거리며 "어제도, 그제도 머리 안 감았단 말이야. 오늘은 감아야 해. 엉엉엉" 이그, 저 결벽증!

"그럼 얼른 씻으면 되잖아. 얼른 씻어!!"

마지못해 샤워실로 들어간 **가 잠시 후 나와 2층 침대로 올라가는 게 보였다. 이런저런 뒷정리를 하다 **에게 물었다. "잘 씻었어? 이그 진즉 이렇게 씻으면 좀 좋냐. 잘자~" 그런데 **가 이불을 홱 뒤집어 쓰며 "몰라!!!"하고 빽 악을 쓰는 게 아닌가. 헉, '뭐야. 벌써 사춘기인거야'. 여기서 밀리면 안  하는 다급함이 일었다. 그런데 정신이 살짝 얼얼해 바로 말이 안 나왔다.


침대에 누웠는데 아무래도 이렇게 넘겨서는 안 될 것 같아 고함치듯 말했다. "**, 지금 뭐하는 거야. 아빠가 잘 못한 게 뭐 있어. 응? ** 안 씻고 자면 이도 썩고 불편할까봐 그랬더니. 빨리 아빠한테 사과해!" 제법 단호하게 말했는데도 **에게서는 아무 말도 안 나왔다. 한 마디 더 붙이고 싶었지만 아직 어린 애한테 나도 너무한다 싶어 그만 두었다.


아침, **가 먼저 일어나 2층 침대에서 내려왔다. 어젯밤 일을 저도 기억하는지 아빠는 없는 사람 취급하며 거실로 나가 책을 읽었다. 평소 같으면 “아빠 밥 줘, 배고파” 했을텐데 9시가 넘도록 말 한 마디 없었다. 독한 것, 분명 아직도 화가 나 있는 것이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화를 낼 사람이 누군데.


잠이나 더 자자 싶어 눈을 감았는데 잠이 안 와 아내와 **가 자고 있는 안방 침대로 기어들어갔다. 심란한 마음으로 누웠더니 첫째와 4살 차이가 나는 둘째 ++가 발차기를 계속 하며 "아빠 저리 가" "아빠 저리 가" 징징거리는 것이 아닌가. 이것들이 진짜.


어젯밤부터 쌓아두었던, 간신히 저 밑으로 유배시켜놓았던 말들이 분노의 역류가 되어 쏟아져나왔다. "**, ++. 니네 진짜 이럴 거야. 응? 아빠가 잘해주고 친구처럼 대해줬더니 아빠가 만만해? 응? ** 안 씻고 자면 이 썩고 찜찜할까봐 씻으라고 한 게 그렇게 잘못한 거야? ++! 너는 아빠한테 맨날 안아달라고 그러면서 필요할 때만 안기고 필요 없을 때는 짜증내냐. 응!!!" 내가 생각해도 유치했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애들은 놀라서 얼음이 됐다. 안 깨우면 오후까지도 잘 아내는 놀라 일어나 "너네, 왜 그래. 뭐 잘 못 했길래 아빠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셔. 응? 말해봐" 하고 애들을 챙겼다. 그렇게 나는 방으로 들어가버렸고 십분이나 지났을까. 울먹거리던 **가 먼저 다가와 "아빠 죄..죄송해요..흑흑...어젯밤에 짜증내서 죄송해요. 엉엉" 하고 말했다. 벌써 좀 울었는지 눈시울이 빨갰다.


당장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래도 짚을 건 짚고 넘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그래야 버릇없는 애가 안 된다는 자가당착에 또 한 번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 "**! 아빠가 평소에 **를 얼마나 이뻐해. 다 ** 위해서 그런 건데...아빠가 서운했겠어 안 했겠어? 응?!" "죄송해요...엉엉"


그렇게 **가 가고 ++가 왔다. "아빠 죄송해요. 발로 찬 거 미안해요. 앞으로 안 그럴게요" 뭔가 어설펐다. "너 빨리 사과하고 빵먹고 싶어 그러지?" 하고 물었더니 고민도 없이 답했다 "응~"


그런 **, ++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더라. 괜히 애들한테 트라우마가 생기는 건 아닐까. 이렇게 불편하고 무섭고 어려운 아빠가 되는 건 아닐까. 그래도 잘못은 짚고 넘어가야겠지? 그래도 분노를 쌓아두었다가 엉뚱한 때 폭발을 하거나 나 홀로 처량하게 슬픔을 감추는 것보다는 나아, 암 그렇고 말고.    


그렇게 잘못은 짚고 넘어가는, 나름 끊고 맺는 것이 정확한 아빠인 척 하며 아이들과 포옹을 하고 화해를 했다. 화 낸 죄로 오후에는 애들을 데리고 교보문고에도 다녀왔다. 주말 시위 때문에 마을버스가 경복궁역까지밖에 안 가 교보문고까지는 유지를 안고 오갔다. 미안한 마음에 **가 읽고 싶다는 책 다 사주고, 다리 아프다고 안아달라는 ++도 단박에 안아주었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하루를 정리하다보니 갑자기 오늘을 기억해 두고 싶었다. 평소 아빠가 된 나 자신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는데 오늘 아침 유치한 말까지 하며 화 낸 것을 돌아보니 몸만 컸지 여전히 마음은 철없는 아이같다. 어쩌면 나는 죽을 때까지 영화 <앵무새 죽이기>의 그레고리 펙처럼 어른스럽고, 든든하며, 멋진 아빠는 될 수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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