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며, 나의 생활 반경은 점점 넓어졌다. 도보 2분 거리에서, 5분 거리. 5분 거리에서 7분 거리로 말이다. 그 시절 나는 우물 안 개구리의 표본 그 자체였다. 그렇게 편하게 12년 간의 의무교육을 성실히 받고, 대학에 입학했다. 내가 다녔던 대학은 참 애매했다. 다름 아닌 위치적으로 말이다. 집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또 그렇다고 가까운 것도 아니었다. 한마디로 자취를 하기엔 돈이 아까워지기 시작하는 딱 그 정도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신입생 시절 1년 내내, 편도 한 시간 반, 하루 세 시간 이상을 거리에서 보냈다. 출퇴근 길이 겹치는 날이면, 마치 알을 품고 있는 펭귄처럼 책가방을 다리 사이에 품고,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지하철 파업이 있는 날이면, 평소보다 일찍 집을 나서서, 평소보다 늦게 집에 귀가했다. 당연하게도 어느 순간부터 그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노란색 토익 단어장을 분철해서 틈틈이 보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습관이 되진 못했다. 버스나 지하철은 나를 집으로 데려다준다는 점에서야 분명 고마운 존재였다. 하지만 그 고마움은 피로와 엉켜, 어느새 사라지고, 지긋지긋함만 남았다.
'경기도민은 인생의 20%를 길거리 위에서 보낸다.'라는 말이 있다. 약간은 과장된 표현이긴 하나, 이 말은 여전히 공감이 된다. 왜냐하면, 어디를 가거든 적어도 넉넉잡아 2시간은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에서 보내는 시간이 이전과 달리 낭비로 느껴지진 않는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시간이 휴식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길에서 낭비되던 시간이 이제는 휴식이 된 것이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대하여 수용하는 태도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니다. 또한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라는 식의 어떤 자기 합리화도 아니다. 그저 살다 보니, 휴식의 정의가 바뀐 것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안심할 수 있는 그 순간. 그것이 나의 휴식이다. 정해진 목적지로 가는 길 위에서는 어떤 것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더더욱 안심이 된다. 그것은 마음 놓고 그 무엇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와 같기 때문이다. 내 안에 은은하게 깔려 있는 행위에 대한 강박. 그로부터 잠시나마 벗어난 그 시간 속에서, 나는 진정한 쉼을 얻는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안전하다는 느낌은 낯설다. 그것은 아마도 그 감각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나의 휴식은 내가 스스로 챙겨야 한다. 즉, 나는 쉼에 대하여 의구심을 갖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나를 둘러싼 환경과 조건 등을 모두 고려해, 나만의 쉼을 언제든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의 쉼이 나에게 잘 맞는지 곱씹어보았고, 삶의 환경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쉼의 핵심적인 조건들을 찾아보았다.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휴식이라는 것이 정해진 코스에 따른 가벼운 운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점심시간과 같이 남들이 다 쉬고 있는 시간에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한 바퀴에 25km라는 정해진 코스를 따라 숨이 차지 않을 정도의 강도로 자전거를 타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앞서 말했던 대중교통을 타고 목적지에 가는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은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나의 몸은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나 지하철이 된다. 그리고 나의 정신은 그것을 타고 있는 승객이 된다. 그렇게 가벼운 운동을 통해, 내가 정한 쉼의 코스에 스스로를 놓아주면, 저절로 그 코스를 따라 나는 움직일 것이고, 그 상태에서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으므로 진정한 쉼을 경험하게 된다.
다음으로 나는 무조건 점심시간을 활용한다. 점심시간과 같이 모두가 쉬고 있는 시간에는 나도 쉬어도 괜찮겠다는 안심이 든다. 그게 바로 내가 점심시간을 활용하는 이유다. 눈치도 덜 보이고, 죄책감도 덜 든다. 그러니 이 시간은, 정신적 에너지를 가장 덜 소모하면서도 가장 충실하게 쉴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