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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감에 대하여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

by June H


#1


존재감을 논하기 앞서


존재감이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우리는 이 표현을 종종 사용하지만, 막상 그 의미를 구체적으로 묻는다면 선뜻 설명하기 어렵다. 사전적으로 존재감이란 사람, 사물, 느낌 따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되는 감각을 의미한다. 즉,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때, 그 대상이 지금 여기 있음을 뚜렷하게 알아차리는 감각이 곧 존재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누구에게서 이러한 감각을 느끼게 될까?


우선, 각자 어떤 사람의 존재감을 선명히 느꼈던 경험을 떠올려보자. 사람마다 그 경험의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보통은 내가 잘 알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그들 중 누군가가 유독 선명하게 느껴졌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특별히 그 사람이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말이다. 반대로, 눈앞에 수많은 사람이 있음에도 그들에 대한 존재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이를테면,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한 카페 한구석에 혼자 앉아 있을 때가 그렇다. 사람들은 분명히 내 시야 안에 있지만, 그들의 존재는 배경과 같다. 나의 인식에 닿지 않은 채, 그저 흐르는 장면의 일부로서 존재할 뿐인 것이다.


결국 존재감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 감각은 결국 제한된 관계 안에서만 발생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으려면, 먼저 그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와 경험이 머릿속에 이미 저장되어 있어야 한다.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맥락을 함께 공유하게 될 때, 우리는 그들 각자의 존재가 얼마나 다르게 다가오는지를 비로소 느끼게 된다.





#2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다면?


지난주 금요일 저녁, 나는 금요예배에 참석했다. 자발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고, 반주를 부탁받아 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반주를 하는 시간만큼은 내 선택이었지만, 설교를 듣는 시간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그 차이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설교 시간 동안 나는 멍하니 그저 자리를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목사님이 갑작스럽게 내게 질문을 던졌을 때,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목사님이 내게 질문을 던지던 그 순간, 나는 예배당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들에게 있어 이것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졌을까? 아마 아니었을 것이다. 나는 그 공간에 있었지만, 그 흐름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지 않았다. 여전히 내 주의는 나의 생각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순간에 나의 존재감은 희미했을 것이다.


결국 나라는 대상의 존재감을 느끼는 것은 타인의 몫이지만, 나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은 나의 몫인 것이다. 즉, 내가 나의 존재감을 먼저 드러내고, 그다음 그것을 타인이 인식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내가 나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존재감과, 타인이 나에 대하여 느끼는 존재감은 별개가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존재감에 관한 거의 모든 질문은 ‘나는 어떻게 나의 존재를 드러낼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수렴된다고도 볼 수 있다.


나는 사람마다 자신과 세상을 구분 짓는, 보이지 않는 어떠한 윤곽선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선의 굵기와 선명도가 그 사람의 존재감을 결정한다고 본다. 여기서 말하는 선은 단순히 개성이라고 불리는, 사람의 어떤 독특한 면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신이 선택한 삶을 살아간다는 감각에 가깝다. 물론 우리의 삶은 수많은 불확실성에 놓여있기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이 어쩌면 통제할 수 없는 우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은 내가 선택한다는 그 느낌을 우리는 가질 수 있다. 이 자율성의 감각이 분명하게 인식될 때, 그래서 자신의 선택 위에 삶을 놓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선명한 윤곽을 그려낼 수 있다. 그 뚜렷한 경계를 이룰 때, 그제야 비로소 희미해지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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