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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내 Aug 16. 2024

전쟁을 통해 확산된 커피

전쟁과 커피

커피와 전쟁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커피는 전쟁과 인연이 깊다. 
커피가 졸음을 쫓아내는 각성 효과와 더불어 에너지를 보충해 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에 전투를 하는 군인들에게는 필수품이었다.  

커피의 향과 온기가 피로를 경감하고 스트레스를 완화해 주었다. 

수많은 나라가 커피를 군수품으로 징발해 병사들에게 우선적으로 지급했다. 
전투 중인 군인들에게 대량으로 커피를 공급해야 하기 때문에 전쟁이 발발하면 민간에서는 커피 품귀 현상이 발생한다.  


커피의 고향인 에티오피아에서는 5,000년 전부터 전투를 하러 떠날 때 커피를 휴대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 커피는 지금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커피 열매를 볶아 가루로 만든 뒤 동물 기름을 섞어 둥근 반죽으로 만들었다. 
카페인 성분이 포함되어 있었으니 병사들이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로 전투에 임했을 것이고 동물성 기름도 높은 칼로리 식품인 만큼 고된 전투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커피는 전쟁을 통해 여러 지역으로 전파되었는데, 이 같은 사실은 역사에서 흔히 발견된다.
1683년에 오스만 제국(터키)이 유럽을 침략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 빈(Wien: Vienna) 외곽을 둘러싸고 장기전을 펼쳤다. 

2개월 동안 포위된 오스트리아 군대는 주변의 동맹국들에게 지원을 요청해야 했다.
터키에서 거주한 적이 있던 콜시츠키(Kolschitzky)에게 터키 군복을 입혀 전령으로 이 역할을 맡겼다.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 마을에서 태어난 콜시츠키는 루마니아어, 터키어, 헝가리어를 배웠고, 비엔나 동방무역회사와 이스탄불 대사관에서 터키어 통역사로 일한 적이 있었다. 

콜시츠키가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결과 오스트리아 군대는 폴란드 등 동맹군의 지원을 통해 칼헨부르크 언덕에서 터키군을 물리쳤다.  


터키군은 달아나기에 바쁜 나머지 가축과 곡물을 두고 떠났다. 

오스트리아 군대가 획득한 전리품에는 커피 500포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병사들은 커피가 무엇인지 몰랐기 때문에 불에 태워버리려고 했다.  

터키인들이 마시던 커피에 관해 잘 알고 있던 콜시츠키는 커피를 달라고 했다. 

그는 커피를 받아 빈 중심가에 중부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 '파란 병 아랫집'을 열어 커피 문화를 전파했다.  
'파란 병 아랫집'은 319년이 지난 뒤에 미국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한다. 

교향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제임스 프리먼이 2002년에 미국의 오클랜드에서 커피 회사를 설립하면서
이름을 '블루보틀(Blue Bottle)'로 정한 것이다. 
콜시츠키의 영웅적인 행위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커피의 역사적·문화적 의미를 부각한 기발한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블루 보들은 스페셜티 커피로 유명해져 '커피 업계의 애플'이라 불린다.


어찌 되었든, 오스만 제국은 팽창 정책을 통해 유럽 동남부, 서아시아. 북아프리카 등 3개 대륙을 점령하고, 커피를 무슬림 세계에 전파했다. 
나폴레옹도 1804년에 황제가 된 후 기독교 국가로는 처음으로 커피를 군대 보급품으로 지급했다.



미국의 남북전쟁(1861-1865) 당시 북군은 남부 지역의 항구를 봉쇄해 남부군에 커피가 배급되는 것을 막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커피 가격이 하락해 브라질의 커피 생산자들이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1파운드당 가격이 14센트로 상승하고, 이듬해는 32센트로 올라갔으며, 결국 42센트로 최고가격에 도달했다. 
전쟁이 종료되면서 커피 가격은 다시 18센트로 하락했다. 
 

최대 구매자는 북부군으로, 1864년에 군대가 구매한 생두의 양이 4천만 파운드에 달했다.  

북부군 병사들에게는 매일 0.1 파운드의 생두가 배급되었는데, 이를 연간으로 환산하면 약 16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전쟁은 무기와 더불어 커피의 붐도 가져왔다. 
북부군 병사들은 한밤중에 행군을 시작하기 전이나 불침번을 서러 가기 전에, 행군이나 불침번을 마치고 막사로 들어와서 늘 커피를 마셨다.  

커피가 남북전쟁의 승패를 갈랐다는 견해도 있다. 

북부군 병사들이 커피를 마셔서 각성 상태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공격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커피 가루는 금방 산패되기 때문에 병사들은 생두를 가지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갈아서 사용했다. 
군대의 취사병은 늘 그라인더를 휴대하고 전장을 이동했다.  

남북전쟁은 병사들이 평생 커피 맛을 잊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쟁이 일반 시민에게도 커피 수요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커피의 수출입이 정지되었다. 
당시 생두를 들여오던 유럽의 항구에 커피를 실어 나르던 선박이 드나들 수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커피를 달라는 병사들의 요구가 빗발쳤다. 
특히 전쟁 전에 양질의 커피를 마시던 독일에서 커피의 부족이 심했다. 
영국이 북해의 제해권을 잡았기 때문이다.  


커피의 수출길이 막히자 중미 지역 커피생산국의 손해가 심했는데, 돌파구는 미국이 열었다. 
당시만 해도 미국은 가격이 싼 브라질 커피를 주로 수입했으나 중미산 고급 커피의 가격이 하락하자 브라질산 커피를 중미산 커피로 대체했다. 
 

한편, 1917년에 연합국 측에 참여해 유럽에 파견된 미군의 보급품으로 인스턴트커피가 제공되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스턴트커피 산업은 번창을 거듭했다.

히틀러는 1938년에 전쟁을 준비하면서 커피 수입을 제한하고 커피 광고도 중지시켰다.
이듬해에 독일의 커피 수입량이 40퍼센트나 감소하자 히틀러의 나치당은 전국에 남아 있던 커피를 군수품으로 징발했다.  

1939년 9월에 독일군이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미국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미군은 매월 14만 포대의 커피를 징발했다. 
병사 1인당 연간 15킬로그램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중남미에서 생산되는 커피 원두는 양적인 면에서 미국에 공급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선박들이 전쟁에 동원되면서 운송 수단이 부족해졌다. 
독일의 잠수함이 대서양에 출몰함으로써 커피를 적재한 브라질의 선박이 미국으로 항해하는 것 또한 어려워졌다. 
미국으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커피가 군수품으로 보급되자 민간인에게 배급제가 시행되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나서서 일반 국민에게 커피를 한 번 더 우려 마시라고 권고했다. 
군에서는 비상용 야외전투식량으로 알루미늄 포일에 포장된 인스턴트커피를 제공했다. 

1944년경에는 네슬레, 조지 워싱턴 사, 맥스웰 하우스 등이 생산하는 인스턴트커피가 군대에 징발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40억 달러 이상의 생두를 수입했다. 
전쟁이 종료된 후 미국인의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9킬로그램까지 늘어났다. 
1900년대에 비해 2배가 넘는 소비량이다.


전쟁을 통해 커피문화가 확산되고 커피가 군인들에게 가장 소중한 보급품이었다는 사실에 커피의 또 다른 얼굴을 보는 듯하다.

오늘도 로스팅된 원두를 갈아 정성스럽게 커피를 내린다.

커피가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듯이 커피의 맛 역시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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