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나에게 항상 했던 말이다. 오늘은 글을 쓰는 날이 아니지만, 잠깐 밤바람을 쐬고 오는 길에 네 생각이 나고, 많이 보고 싶어서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우리의 헤어짐은 나의 방황, 즉, 꿈을 찾아 떠나간다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화근이 되어 벌어졌다.
너는 당연히 날 믿지 않을 것이고, 나 또한 당장 널 만나기 위해 내 꿈을 포기한다는 소리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꿈이 아닌 신기루였다면?
사막에서 전갈과 뱀에게 둘러싸이고 목은 타들어가는 와중에 오아시스 같은 신기루는 나에게 거절하기 힘든 유혹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번 봤으면 족했을 신기루를 난 세 번이나 보러 갔고, 신기루가 있던 자리에는 해골들과 독기 가득한 독사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고, 세번째 방문때 독사는 내 심장에 독니를 박아 넣었다.
어떻게 무너진 신뢰를 쌓아 올릴 수 있을까? 나는 한편으로는 독사를 만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한다. 독사의 이빨이 내 심장에 박혀있어 나는 신기루는 쳐다도 보지 않게 되었으며, 설령 보인다고 하더라도 저것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살다가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나는?
도망가지 않을 것이다. 정확히는 도망가지 않고 너와 대화를 시도할 것이고, 전처럼 나만의 결말을 지어놓고 대화를 시도하지는 않겠지.
전에 나는 이미 나만의 결말을 지어놓고 널 짐처럼 취급했었다. 너도 그것을 느꼈을 테고, 자신을 짐취급 하는 남자를 누가 만나고 싶어 하겠는가.
누군가는 좋아하는 것은 이 사람을 위해 내가 어디까지 희생할 수 있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는 인간자체를 좋아해 줄 사람은 없다. 신이라면 가능할지도? 아니 자기가 만들어놓고 싫어하는 건 좀 말이 안 되잖아.
희생,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과 함께하려면 필연적으로 우리는 어느 정도 희생을 하며 살아가야 한다.
나는 전에는 희생을 하는 법도 몰랐고, 희생하지 않고 나만을 바라보았다. 그때는 희생하지 않고 나를 위해 살아가다 보면 나만을 위한 인생을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희생을 피할 수 있었을까? 설령 내가 유학을 가고 원하던 직업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나는 언젠가는 사랑에 빠졌을 것이며 그 사람이 나와 100% 맞았을 거라는 보장이 있는가? 그때도 나는 희생을 했어야 할 것이다.
지금이라도 희생이 무슨 의미인지 조금이라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내가 생각하는 희생은 무조건적이며 단기적인 내 그릇된 욕망, 두려움을 피하기 위한 희생이었다.
너와의 관계가 위태위태할 때 너는 나에게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하였으며, 우리는 단지 같이 갈 수 없을 뿐이라고 했다.
나는 그때도 꿈을 포기하려고 하였는데, 그때의 포기는 널 위한 것이 결코 아니었으며, 내 두려움과 너와의 만남을 지저분하게라도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서의 회피였을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는 희생과 포기는 관계를 위한 희생과 포기이다. 예를 들어 야생의 동물들이 자식을 위해 자신의 굶주림과 고통을 견디듯이 그런 희생과 포기가 진정한 관계를 위한 헌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럼 그런 헌신 같은 희생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내가 찾은 방법은 나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인정, 그리고 상대방과의 대화이다.
그리고 이 사람과의 관계를 책임지고 도망가지 않겠다는 태도.
나는 전에는 이런 걸 몰랐다. 뭐, 어디 서점의 책에는 적혀있었을 것 같은데 내가 책으로 지식을 배우는 법도 그때는 몰랐으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 또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 드리고픈 말씀은, 본인이 만일 지금 관계를 끝내야 하는 갈림길에 와있다면 조금은, 한번 더 생각해 보길 바란다.
어쩌면 당신이 선택하는 길은 도망가는 것일 수도 있다. 앞에 있는 공포, 두려움과 마주하기 두려워서 조금 더 편한 길을 선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랬다. 도망가는 걸 그냥 졸아서 튀는 거라고 하면 되는데, "아 이건 방황이라고~ 20대는 방황할 수 있지" 라는 듣기 좋은 말로 포장하며 참 빠르게도 도망갔다.
도망가는 길에는 더 가볍게 도망가야 하니까 전 연인을 놓아버렸지.
세 번이나.
물론 그 공포는 나와 여러분의 인생에 한 번이 아닌, 두 번 세 번, 또는 여러 번 찾아올 것이다. 그때마다 도망갈 것인가?
처음 몇 번은 도망가더라도, 몇 번은 맞서보길 바란다.
맞서 싸우고, 몇 번을 질 수도 있다. 그러나 도망가는 것보다는 낫다. 싸우고 지면 다시 일어나서 다시 싸우면 될 일이다.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이런 글을 쓰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나이와 상관없이 이런 경험을 해본 사람이 하는 말이니, 한 번쯤은 새겨보길.
내가 한번 맞서 싸워본 결과를 말씀드려 보자면 나는 작년 10월부터 여러 연구실에 연락한 결과, 월급 130 정도를 받으며 올해 대학원 후기 입학 전까지 AI연구실에서 인턴 연구원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위치도 좋다. 강남 근처에 있어서 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는다.
작년의 나는 꿈도 없었으며 그저 허황된 꿈을 꾸었을 뿐이다. 그러나 어떻게 저렇게 되었는지는 간단하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맨 처음 서울에 있는 대학의 연구실에 연락했을 때는 여러 번 거절도 당하고, 면접 분위기는 다 좋고 꼭 연락 주겠다고 한 연구실의 답장을 기다리다 비참하게 까인 적도 있었다. 그래도 계속 이메일을 돌리고 영어성적을 만들고 논문을 읽은 결과, 나만의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만의 공포를 마주할 때면 처음에는 놀랄 것이고, 조금 두려워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두려움과 마주할 것이다.
이런 주옥같은(?) 깨달음을 얻는 데에는 그녀와의 헤어짐이 컸다. 그녀와 헤어지고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여러 가지 아주 작은 교훈부터 큰 교훈을 얻어가고 있다
똥차가 벤츠되는 영화의 한 장면
카페에서 글을 쓰는데 그녀가 입던 옷 중에 흰색 털옷에 하트무늬가 박힌 옷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때의 추억을 잠시 그리며 항상 2% 아쉬운상태로 이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