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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힌 Jul 04. 2021

#3 수박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너와 함께 지지배배(遲㢟蓓㟝) - 더디게 걸어갈지라도 너와 함께 꽃 피울


 후식으로 수박이 나왔다. 올 해의 첫 수박을 회사에서 먹었다. 참 달고 시원해서 껍질의 하얀 부분이 나올 때까지 먹었는데, “수박을 이렇게 깨끗하게 먹는 사람 처음 봤어. 가정교육을 굉장히 잘 받았나 보다.”라는 말을 들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과육이 좀 남은 채로 수박껍질을 버린 반면, 내 수박껍질들은 불긋한 부분이 하나도 없이 뽀얀 모습이었다.

 분명 가정교육을 잘 받은 것 같다는 칭찬을 들었는데 남들과 내가 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대화의 중심에 내가 언급되는 게 낯설어서일까? 

순간, 껍질이 하얗게 드러난 게 아니라 내 속살이 드러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박을 먹을 때와 같이 나는 몇 가지 고집을 가지고 있다. 수박껍질을 깨끗하게 먹듯, 치킨의 뼈나 감자탕의 뼈 또한 살점 한 점, 물렁뼈 한 점 없이 먹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식당에서 먹어도 집에서 먹어도 치우는 사람이 좀 더 깔끔하게 치우지 않나 싶달까. 돈이 아깝지 않게 모조리 해치웠다는 후련한 느낌도 들고 말이다.

 짬뽕과 같은 면 종류는 또 다른데, 고명인 야채와 고기, 해물을 먼저 먹고 나서야 면을 먹는다. 퍼진 면이 좋아서 그러는 건 아니고, 어디에선가 본 ‘다이어트할 때 이렇게 먹어라’ 했던 글을 열심히 실천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내용은 아마도 야채나 단백질을 먼저 섭취해서 배를 좀 채우고 탄수화물을 섭취해야 탄수화물을 덜 먹게 된다는 얘기 아니면 야채와 고기의 영양소를 먼저 흡수시켜야 한다는 얘기였던가 했다.

 물건들 같은 경우는 새 제품에 붙어있는 필름들을 한 달 이상-심지어는 다시 되팔 때까지-안 떼고 사용하기도 하고, 몇몇 물건들의 자리를 마음속으로 지정해서 그 위치가 아니면 괜스레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정말 웃기는 건, 항상 제  위치를 지키는 물건들이 있어도 집은 더러워진다는 점이다.


 어릴 적에는 그런 적도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거나 길을 걸을 때, 약속을 정해놓고 걸었다. 흰색 선만 밟고 건너야 한다거나 노란 블록만 밟아야 하는 약속을 말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초등학생 시절 등하교를 할 때 할 수 있던 작은 하나의 놀이였다. 임무를 완수하고 나면 뿌듯하기도 했으니까.

 이 뿌듯함은 지금도 느낀다. 그런데 이런 규칙들이 뿌듯하고 지켜가는 동안 재미도 느끼지만, 가끔 오늘의 수박껍질 사건과 같은 일이 생기면 내가 강박증이 심한 사람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남들은 이렇게까지 안 하는데 나는 왜 굳이 이러지? 좀 편하게 살면 안 되나? 하며 생각하다가도 남한테 피해 주는 것도 아니고 꼭 이런 점을 고쳐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남과 나를 비교하기 때문에 그들처럼 살아야 하지 않나 싶어서 이런 고민을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분명히 안다. 변화하고 싶은 맘에 이런 책 저런 글을 읽어보고 해서 그런지 스스로 인지는 하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이 따라오지 못했다. 본인만의 개성이 좋다는 글을 백 번 천 번 읽어 봐야 뭐하나. 내 눈은 남이 보기에 무난하고 좋은 기준을 쫒고, 그들의 눈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가 신경이 쓰이는데.


 결국 이런 개성, 즉 나다움이란 그 내면이 단단해야 따라온다는 것이다. 남들이 비난하고 기분 나쁜 눈초리로 바라보며 내 껍질 속으로 침투하려고 해도, 자신을 좋아하고 믿는 마음의 껍질이 두껍고 단단하다면 나는 온전한 나로 남을 수 있다.


 수박을 살 때면, 껍질이 얇은 수박을 사기 위해 통통하고 두드려본다. 이렇게 골라진 수박은 큰 칼로 잘리고 먹혀 그들의 입을 달고 시원하게 해 준다. 그렇지만 나와 너는 남들을 시원하고 달게 해 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꼭 이루지 않고 하루하루 즐기며 살아가다 자연의 품으로 되돌아가도 좋고, 열매를 맺고 씨를 뿌려 새싹을 돋아나게 해도 좋다. 그 외에 어떠한 이야기든 네가 정한 엔딩이면 뭐든 좋다. 내가 나를 잃어서야 스스로 인생의 선택을 할 수 없기에 껍질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 나다움을 지켜야 한다. 그러니 친구들아, 겁내지 말고 단단해지자.





글쓴 시누이 - 율힌 yulhin

그림그린 새언니 - 전포롱 jeon polong


시누이와 새언니 - 머리카락

시누이는 머리카락이 무슨 짐승처럼 자란다.

몇 달 만에 만나도 무슨 바야바가 되어 있다.

그런 시누이를 새언니는 부럽다 해주고 긴 머리를 예뻐해준다.

그래서 시누이는 머리가 엉켜도 여름이라 더워도

자신의 긴 머리가 너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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