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회사생각

어느날 병원에서 마주친 두 할머니

베리어 프리 서비스를 이뤄낼 힘을 주소서..!

by 피넛

건강상의 문제로 정기적으로 대학병원에 다니고 있다.


3개월 주기로 방문하던 병원을 6개월 주기로 와도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척 기뻤다.

건강상 문제가 줄어들었다는 의미이기도 했거니와,

(주말에 예약이 어려운 교수님께 진료를 받고 있다 보니 평일에 연차를 내고 병원을 방문해야 하는데) 평일에 연차를 덜 내도 되기 때문이었다. (아까운 내 연차…)


아무래도 자주 오는 병원이 아니기 때문에

매번 수납하고 진료 보는 과정이 헷갈리곤 했다.

일반 외래 진료나 초음파, 골다공증 같은(30대 중반에도 골다공증 수치가 낮아져 위험할 수 있다. 어떻게 알았냐고? …. 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진료와 검사는 사전 수납(요금 지불. 왜 병원이나 통신 업계에서는 ‘결제’라고 하지 않고 ‘수납’이라고 하는 걸까…?)이 가능해서 미리 결제를 해두고 6개월 뒤에 와서 진료를 보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채혈은 사전 수납이 불가해서(왜인지는 모름…), 당일에 병원에 방문해서 수납을 한 후(채혈은 항상 사람이 많아서 외래 수납 창구가 오픈하기 전에 채혈실이 먼저 여는 편인데, 그러면 입원 수납 창구로 가서 수납을 해야 채혈이 가능하다. 어쨌든 돈을 내야 채혈이 가능한 것) 채혈을 하고, 채혈 결과가 나온 뒤 (보통 2시간 정도 소요) 진료를 볼 수가 있다.


요즘에는 창구 수납보다는 키오스크를 통해 대부분의 업무가 가능해서…

나의 예약 정보가 전산에 올라와만 있으면(채혈 예약 정보는 왜 키오스크에 안 뜨는지 아직도 난 이유를 모르겠다… 사정이 있겠지…) 키오스크를 통한 수납도 가능하다.


나는 오전 중에 모든 병원 일과를 끝내고 싶기 때문에 이른 시간부터 병원에 가는데,

정말 놀랍게도, 병원에는 7시만 돼도 사람이 바글바글 하다. 세상에 아픈 사람이 다 모인 듯 (병원이니까 그게 또 맞긴 하지) 병원은 인산인해다.


그날은 채혈 때문에 입원 창구에서 채혈 수납을 한 후, 키오스크 앞에서 외래 추가 진료비를 수납하고 있었다.

내가 키오스크 앞에서 서성이자, 어떤 할머니께서 쓱 다가오시더니 어떤 종이를 내 앞에 팔랑팔랑 흔들었다.

나:????

할머니: 이것 좀 도와줄래요? 눈이 잘 안 보여서…

할머니는 키오스크를 이용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나: 네…? 이거요? 결제하시면 되나요?

할머니: 으응… 고마와요. 내 주민등록번호 불러줘요?

나: 네…??!! 아뇨!! 여기 종이에 환자번호로 제가 입력해 드릴게요. 주민등록번호 아무한테나 알려주시면 큰일 나요. 여기 금액이 뜨네요. 이제 카드 넣으시면 결제되실 거예요!


낯선 할머니께 개인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 주의를 드리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에 더 이상 처음 보는 이의 잔소리를 들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나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채혈을 하고 진료까지 약간의 시간이 남아서, 집에 돌아가 잠깐 눈을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집에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어떤 할머니가 (키오스크 할머니와는 다른 할머니다.) 쭈그려 앉아계셨다.

나는 ‘할머니가 다리가 안 좋으신가 보다.’ 하고 엘리베이터 안의 올라가는 숫자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내릴 때가 되셨는지(엘리베이터 안에는 할머니와 나 단 둘 뿐이었다.) 갑자기 아무 말 없이 나에게 손을 내미는 게 아닌가????!!!!!



순간적으로 ‘이 손은 무엇을 의미하는 손인가.’, ‘악수를 권하는 건 아닌 거고…’… 하다가

‘일으켜달라는 바디랭귀지구나!’ 퍼뜩 떠올라,

할머니가 내민 손을 말없이 잡고 쭈그려 앉은 할머니를 일으켜 세워 무사히 엘리베이터를 내리실 수 있게 도와드렸다. (일절 대화는 없었다)


그렇게 집에 돌아와 잠시 눈을 붙이려고 하는데,

여러 할머니들에게 도움을 준 상황이 희한하게 느껴 저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키오스크를 잘 사용하지 못하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리는 것이 어려운 노인들이 내 주변에 있었구나.

항상 집, 회사, 집, 회사만 다니다 보니 노령의 사람을 마주할 일이 많지 않았는데,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이 체감되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는 사용자 테스트라는 명목으로 여러 사용자들을 모시고 의견을 듣는 일이 많았는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용자, 고객은 주로 젊은이였다.

전 연령을 표방한다고 해도 사실상 서비스의 주요 타깃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라, 시니어 타깃의 서비스가 아니라면 현실에선 노인들을 위한 기능은 후순위로 밀리기 마련이다.


노인뿐만 아니라, 장애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회사에서 인권위를 통해 지적받은 사항이나 장애인 고객의 민원이 접수되면 기능 개선을 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대형 프로젝트가 함께 진행되면 이런 일들은 뒤로 밀리곤 했다.


우선순위란 그렇다.

서비스의 영향도가 큰 일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우선순위로 소외되는 사람이 생길 때, 나는 속상했다.

사용자의 불편함이 코앞에 있는데, 뭘 하면 될지 굉장히 명확한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 때… 무기력함을 많이 느꼈다.

내 서비스지만 내가 우선순위를 조정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롭고 슬펐다.

소수의 사람도 소외받지 않고 평등하게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하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니…


두 할머니를 만나면서 내가 회사원으로서, 나의 일로써 도움을 줄 수 없던 일들이 마구 떠올랐다.

회사원으로서의 한계를 마주한 기분.


회사에서 조금 더 입지가 생기고, 영향력을 갖고 싶은 이유이기도 하다. 조금 더 강하게 소리내어 ‘하자!’ 고 얘기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모두가 마음 편히 이용할 수 있는 베리어 프리 서비스에 한발 더 내딛기 위해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내 위치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

소수를 위한 소리를 회사 내에서 내주는 것!

그것이 아닐까 싶다.


병원에서 마주한 노인들에게서 나의 미래를 그려보았기 때문인걸까?

어느때보다도 권력욕이 움트는 날이었다.

(갖고싶다. 우선순위를 휘두를 수 있는 파워! 소수를 위한 기능을 넣는 것으로 우선순위가 바뀌어도 무너지지 않을 강력한 비즈모델!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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