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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Jul 15. 2023

회사밖의 만남

에네르기 받아갑니다

 직장인들의 삶이 으레 그러하듯 두 달 전에는 약속을 잡아놔야 비로소 만남이 성사된다.


내일은 두 달 전에 잡아둔 전 직장 동료와의 약속날이다.

'경조사 아님, 보험 아님, 장판 아님, 팔이피플 아님...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밥 한 번 먹고 얼굴이나 보려고요'하며 서두를 꺼내 겨우 겨우 잡은,

MBTI 'I'로서는 한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귀중한 약속이었다.


장마 기간이라 집안에 일이 생겼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약속 하루 전 날 "드디어 내일입니다." 하고 리마인드 톡을 보냈다.  

몇 분 뒤에 다소 장문의 답신이 왔길래 '혹시 파투...?' 인가 싶었는데 다행히도 약속 장소를 정확히 하려는 회신이었다.

먼저 약속을 제안한 건 내 쪽이지만 상대방은 먹고 싶은 메뉴를 확인하곤 점심 메뉴와 장소를 정해주었다. 프로 직장인의 약속 어레인지란 이렇게도 신속 정확 깔끔하다.


편안한 마음으로 잠이 들고 드디어 약속날.

늦어서 허둥지둥하다가 사과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지는 않기 때문에 보통 약속이 있으면 조금 일찍 나오는 편이다. 게다가 요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차가 막힐 수도 있으니 조금 이른 출발을 했다.

그리고 약속 장소 근처에 미리 알아본 서점에 들른다.

오늘 약속에서는 상대방이 점심을 사주겠다고 할 것이 뻔했다. 왠지 매번 얻어먹기만 하기도 미안한 마음에 뭐라도 작은 선물을 준비하기로 한다. 물건을 늘리는 걸 좋아하지 않는 상대방이지만 책에 있어서는 후할지도 모른다. 다 읽고 중고서점에 판매도 가능하니 효율적이기도 하다.

'역시 책뿐이야.' 하고 오늘 약속의 주인공이 좋아할 만한 책을 고르기 위해 서점에 발을 들였다.


비가 와서 습하고 꿉꿉한 밖의 날씨와 다르게 서점 안은 시원하고 쾌적하고 책 향이 가득해서 기분이 좋아졌다.

오프라인 서점에 들른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온라인 서점은 이동시간도 들지 않는 데다가 쉽고 편하다. 게다가 책 한 권을 산다고 해도 무료배송을 해주는 온라인 서점도 많기 때문에 딱히 불편함을 느낀 적은 없다. 하지만 이렇게 오프라인 서점에서 실물 책들이 한눈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펼쳐진 것을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

조금은 들뜬 기분으로 천천히 서점 한 바퀴를 돌며 오늘의 책을 선정해 본다.   


에세이나 경영서나 자기 계발서 같은 책은 상대방이 알아서 많이 볼 것 같으니 패스.

그림책이나 소장가치가 있는 책이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내용을 모르니까 표지만 보고 골라야 해서 신중해진다.

서점을 천천히 한 바퀴를 돌면서 눈에 띄는 책을 탐색한다.

그러다 발견한 '맥도널드 35주년 기념북'.


나는 오늘 약속의 상대방이 딱히 가리는 건 없지만 유독 햄버거를 좋아했던 것을 떠올린다.

그리고 매거진 B를 열심히 읽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한 브랜드의 역사와 스토리가 담긴 책이라면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비닐로 랩핑 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책 한 귀퉁이 모서리 쪽의 비닐 한쪽이 찢어진 것을 발견했다. 선물할 책이니까 이왕이면 깔끔한 책이 낫겠지 싶어 조금 아래쪽에 있는 책을 뒤져 꺼냈다.

상대방이 좋아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상대방을 위한 책을 골랐는데도 여전히 시간이 남았다.

서점을 목적 없이 배회하다 문득, '피넛님, 저 그 책 읽었는데 엄청 공감되더라구요.' 하고 현직장 동료가 추천해 준 책이 떠올랐다. 누군가의 추천이 있다면 일단 신뢰가 간다. '배민 기획자의 일'이란 제목의 책도 집어 들었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나는 평소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과의 약속을 하나 둘 잡았다. 완전히 낯선 사람들과의 모임도 한번 가졌다. 먼저 약속을 잡고 외출을 하는 일은 평소의 나라면 잘 하지 않는 행동이지만,

'매번 똑같은 행동만 해서는 변할 수 없으니까 안 해본 짓을 좀 해보자' 싶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기운을 받고 싶었다.

열심히 손품을 판 결과 이뤄진 몇 번의 만남들이 있었다.

오늘도 그 만남 중의 하나이다.


나는 조금 뒤에 있을 만남을 생각했다. 안부를 묻고, 불행 배틀을 하고, 신세 한탄도 하며 공감하다가 결국에는 위로와 응원으로 끝나리라. 각자의 시간에서 벌어진 새로운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또 각자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해 길을 나서는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회사에서 알게 된 사람을 회사가 아닌 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조금 희한하고 기이한 기분이다.

조금 더 사적이고 새로운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간의 시간의 갭을 채우기에 점심시간 1시간으론 부족하겠지만,

그래도 각자의 삶을 잘게 쪼개 공유하는 시간이니만큼 대화가 아닌 것으로 충족되는 것도 있을 것 같다.


오늘의 만남이 채워줄 에너지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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