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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넛 Mar 25. 2023

스콘에서 느낀 성취의 맛

진한 버터향으로 감춰보는 일상의 무게

“결혼? 관심 없는데?”를 말하던 시크한 ’희‘는 우리 무리 중에 가장 먼저 결혼을 했고,

“아기? 아기는 무슨, 아기 키울 돈이 있어야 낳지.”라며 자조적으로 웃던 그녀는 이제 태어난 지 6개월이 된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엄마’였다.


결혼 소식과 임신 소식을 알릴 때마다 그녀가 했던 말은 “정신 차려보니 이렇게 되었네.”였다. 속으로는 ‘이 험한 세상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지. 그렇게 얼레벌레 살 거야?!’라고 호통치고 싶었지만 내심 행복한 표정의 그녀 앞에서 차마 이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그저 “축하한다. 잘했어.”라며 앞날을 축복하는 수밖에.


사실은,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만의 계획과 확신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것을 안다. 무심한 듯 말하지만 사실은 속이 깊은 친구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까. 차근차근 삶의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겠지.


나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나머지 친구들은 결혼은 했지만 아직 아이는 없었다. 우리가 양육의 어려움을 완벽히 이해하지는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아니면 아쉬운 소리 하기 싫어하는 ‘희’의 성격 탓인지 우리의 카톡방에서는 아기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처한 외로움 만은 짐작할 수 있었다.


친구들 중에는 양육이라는 교집합을 가진 사람은 없고, 최근 야근이 많아졌다는 남편의 도움에는 한계가 있었고, 아기를 맡아줄 사람은 없고, 하루종일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함께 6개월을 버텨왔을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기쁨도 물론 있겠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다는 것은 경험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모양은 이래도 맛은 그럭저럭 먹을 만할 거야.”


‘희’는 쑥스러운 티를 감추기 위함인지 자못 씩씩하게 말하며 종이봉투 속에서 지퍼백을 주섬주섬 꺼내기 시작했다.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내며 지퍼백 속에서 나온 것은 ‘스콘’이었다.


스콘은 빵과 쿠키의 중간쯤 되는 과자로, 최근 홈베이킹을 시작한 그녀가 자주 도전하고 있는 메뉴 중에 하나였다.


“어, 이거 스타벅스 미니 스콘이랑 모양이 똑같네.”


한 입 크기로 작게 잘라진, 묘하게 기울어진 사다리꼴 모양의 스콘을 보며 내가 호들갑스럽게 칭찬했다.


“에어프라이어에 160도로 5분 정도 돌리면 조금 더 맛있을 거야.”


반년만에 얼굴을 보는 친구를 위해 어제저녁에 열심히 만들어낸 스콘. 최상의 맛을 위해 연구까지 해 온 모양이었다. ‘희’의 가이드에 따라 에어프라이기를 돌리니 몇 분 뒤에 코 끝에 버터향이 감돌았다.


한입에 먹으려면 충분히 먹을 수 있는 사이즈의 스콘이었지만, 왠지 열심히 만들어준 스콘을 한 입에 와구와구 넣고 싶지는 않았다. 그릇에 담아 포크로 가장자리를 살짝 잘라 입으로 가져갔다. 스콘은 바삭함과 부드러움이 절묘하게 섞인 맛이었다.


“와, 이거 진짜 맛있는데?”


“그렇지? 버터 진짜 좋은 거 썼어.”


‘희’는 스콘을 오물오물 음미하는 나와 스콘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아기는 마음대로 안되지만, 베이킹은 마음 가는 대로 만들 수 있지 않냐”며 이야기를 시작하는 그녀에게 몇 번의 베이킹을 시도해 본 적 있는 나로서는 ‘베이킹이란 게 마음대로 되는 거였어?!’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시중에 파는 것보다 훌륭한 맛의 스콘을 먹은 이상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상황에 대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아기. 분유를 줘도, 이유식을 줘도, 기저귀를 갈아줘도, 아이 앞에서 재롱을 떨어도 아기는 울음을 멈추지 않는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무슨 말이라도 해줬으면 좋으련만, 어딘가에 지혜를 빌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도움을 구할 곳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을 버티기 위해 그녀가 택한 길이 베이킹이지 않았을까.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돌파구. 그러니까 ‘희’의 베이킹은 아기에게서는 얻을 수 없는 하루하루의 작은 성취감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정해진 레시피에 맞춰 조리하면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는 베이킹.


내가 음미한 스콘의 맛은 그녀가 느낀 성취의 맛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일상을 버티는 힘은 이런 데에서 나오는 게 아닐까.

오늘도 무언가를 해냈다는 작은 결실을 보는 것 말이다.

아이가 주는 커다란 행복이 일상이라는 이름에 가려 잘 느껴지지 않을 때, 내가 제어할 수 있는 것들로 채우는 것.


밀가루, 버터, 설탕의 조합으로 근사한 디저트를 만들며 스스로 행복을 찾고 성취를 느끼는 그녀처럼,

나도 나만이 찾을 수 있는 작은 것들로 하루를 채워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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