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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Jan 25. 2022

오직 신앙이 불안을 온전히 극복한다

- 밤과 꿈의 신앙 에세이(8)

 흔히 정상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방탕을 일삼을 때 우리는 타락했다고 한다. 타락의 사전적 의미를 보면 타락이란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잡되고 나쁜 길로 빠진" 상태를 뜻한다. 덧붙여 기독교에 있어서는 "죄를 범하여 불신의 생활에 빠진" 상태라고 한다. 옳은 뜻풀이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적으로는 죄를  너무 단순화한 것 같아 여기서 죄의 정의에 대하여  한 번 되짚고 갈 필요를 느끼게 된다.

 기독교인에게는 죄는 매우 친숙한 개념이다. 우선 기독교인이라면 우리 자신이 원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범한 원죄로 인해 우리가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구속 사역은 기독교 교리의 근본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깃든 죄성으로 해서 날마다 짓는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본성을 닮아가도록 애쓰는 것이 신앙 생활인 것이다.

 따라서 기독교의 시각으로 볼 때 죄로 한 타락은 인간의 본성에 내재되어 떠도는 혈전처럼 위험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렇다면 우리를 타락케 하는 정신적 기저는 무엇일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죄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가. 그것은 우리의 내면에 자리 잡고 있는 '불안'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불안은 우리가 어디에도 뿌리를 내리고 있지 못하다는 나그네의 감정이다. 아마도 이런 불안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쫓기듯 떠나는 순간에서 시작된 감정으로 원죄의 발현(發現) 일 수 있다.

 따라서 원죄를 가진 인간이기에 우리는 모두 숙명처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불안이야말로 인간에게는 낯설지 않은 일상이기에 우리가 흔히 외롭다고 느낄 때 그 외로움은 불안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자체가 불안 덩어리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요즘과 같이 재앙에 가까운 이상 환경과 코로나로 인해 내일을 예측하지 못할 때 불안은 극한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이처럼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우리는 현실에서는 불안을 극복할 궁극적인 해결책을 구할 수 없다. 그것은 이 세상이 욕망에 기초하여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의 대홍수 이후 시날에서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았듯이 오늘의 사람들도 욕망을 포기하지 못한다. 소비적인 물질 사회에서 사람들은 성욕, 물욕, 명예욕이라는 욕망에 휘둘려 살아가는 것이다. 이들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면 사람들의 불안은 가중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욕망을 갈구하는 것이다. 이때 이른바 출세라고 말하는 물질과 명예의 성취로 사람들은 불안이 해소될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끝이 없는 욕망의 속성으로 볼 때 욕망의 추구는 더 큰 불안을 불러온다. 설혹 더 이상 나아갈 지향점이 없을 만큼 물질과 명예를 얻었다고 할지라도 그 성취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프레이저(J. G. Frazer)의 '황금 가지(The Golden Bough)'에 나오는 네미 호수의 사제의 심경과 같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물욕, 명예욕과 같은 세속적 가치를 그대로 교회 안으로 이전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태복음 6:24)

 

 물론 고도로 발달한 물질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는 세속적 가치가 주는 달콤한 유혹을 온전히 뿌리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세속적 가치를 함께 섬길 수 없다고 결연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속적 가치를 청산하지 않은 상태로 교회에 나와 하나님의 영원한 가치를 구하고 있으니 이는 우상과 하나님을 함께 섬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야말로 심각한 불신이다. 그리고 교회는 교회의 유지와 성장을 위해 이를 묵인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따르는 준엄한 실천을 짐짓 외면한다. 이를 두고 흔히 교회의 세속화라고 지적하지만 차라리 현대 교회의 타락이라는 표현이 더 솔직하다. 물론 이와 같은 생각이 지나치게 자의적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적으로 부정될 생각은 아닐 것이다.

 우상이 거침없이 넘나드타락한 교회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순결을 회복하는 길이야말로   이 시대의 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신앙 공동체로 거듭나는 것이다. 세속 가치가 아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진정한 가치로 무장할 때, 우리는 불안을 극복하고 영원한 생명의 의미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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