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분(秋分)이 반가운 이유

by 밤과 꿈

산자락 길을 벗어나 산에 난 오솔길로 접어든다. 태풍 난마돌이 물러난 후 가을이 성큼 우리에게로 다가오고 있다. 트레킹 하는 마음도 한결 상쾌하다. 초입의 오르막길을 바투 걷다 보니 이내 평지가 나오고, 본래의 길과는 별도로 조성된 산책로가 한동안 지속된다. 오늘은 푸른 하늘을 좀 더 만끽하기 위해 수월한 평지로 방향을 잡는다. 그리고 산책로라기에는 비교적 넓은 공터를 만나게 되고 잘 식재된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산 아래 민가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다 지기도 했지만 지대가 조금 높은 이곳에서는 이제 코스모스 꽃이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코스모스는 개화 시기가 긴 초본 식물의 하나라서 오래 꽃을 감상할 수 있다.

문득, 가을을 담고 부는 산들바람을 따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를 보다 보니 조금은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왜냐하면 코스모스가 일년생 초본 식물이기 때문이다. ‘순정’이라는 꽃말처럼 저토록 여린 식물이 일 년을 살다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안쓰러울 수밖에. 물론 종자로 번식하는 식물이기 때문에 꽃이 피었다 진 자리에서 일 년 후 다시 코스모스가 자라 꽃을 피우겠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코스모스는 일 년 전의 코스모스와는 다른 개체인 셈이다. 겨울 일 년을 살면서 보다 강렬한 꽃을 피우지 않고, 저렇게 순하디 순한 꽃망울을 터트릴 수 있다니 천성이 남다른 꽃이라 더욱 사랑스럽게 생각되는 꽃이 코스모스다.


어제가 추분이었다. 춘분과 함께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날. 이 날을 기점으로 서서히 낮보다는 밤이 길어질 것이다. 이는 나처럼 야행성이 강한 사람에게는 더없이 반가운 사실이지만 이 날로부터 무더웠던 여름이 물러가고 가을이 시작된다는, 반가운 사실을 뜻하는 것이다. 여름에 자연재해를 겪은 사람들에게도 가을의 시작이 마음에서 낙담을 덜어내고,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반가운 소식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는 ‘새롭다’라는 의미의 언어가 얼마나 소중한 보석인지 모른다. 하루 해가 저물면 뒤 이어 안식의 시간이, 그리고 다시 태양이 떠오른다. 하나의 계절이 물러가면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한 해가 다 가면 제야의 종이 울리고 우리는 환호와 함께 새해를 맞이한다. 이처럼 지구에서 경험하는 우주의 시간은 어김이 없다. 그리고 이 현상은 오래 변함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우주적 현상에 이끌려 자연의 생태와 우리의 삶이 유지된다. 이와 같은 섭리를 생각할 때 모든 생명에게 더 이상의 축복이 없지 싶다. 태양과 지구의 운행을 따라 어김없이 찾아온 추분이 반가운 까닭이다.

밤하늘의 달이 기울면 찰 때가 있듯이 우리의 삶 또한 지금의 곤란도 사라질 때가 있으리라는 희망에 의지하여 매일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모스에게 허락된 시간이 한 해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코스모스를 바라보는 마음이 안쓰럽기만 하다. 게다가 바라보는 마음에 어울리게 하늘거리는 연약한 줄기가 안쓰러움을 더한다. 그래도 코스모스는 하늘거리는 여유로운 몸짓에서 보여주듯 자족하는 법을 이미 터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을을 향하는 내 발걸음도 가볍고 마음도 한결 여유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