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마지막 날, 반갑지 않은 미세먼지와 높은 기온이 초가을을 지나 한 발짝 가을의 절정에 다가가는 감흥을 무디게 한다. 그래도 우리의 감흥과는 상관없이 자연은 시간을 따라서 가야 할 길을 알아서 간다. 가로수로 심긴 벚나무의 잎이 벌써 물들 조짐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웃집 담벼락의 덩굴도 햇살을 받아 일찌감치 빨갛게 물이 들고 있다. 앞으로도 날씨가 덥든지 춥든지 크게 상관하지 않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가을은 무르익어갈 것이다.
그리고 여름의 무더위에 시원한 그늘을 선물하던 나뭇잎이 모두 떨어지고 말라,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는 때가 올 것이다. 또한 오곡을 여물게 하던 따가운 햇살도 탄력을 잃고 시들해질 때가 올 것이다. 바야흐로 다가오는 시월과 십일월은 헐벗은 겨울에 앞서 가진 것을 모두 내려놓는 상실의 계절이 될 것이다. 또한 이 계절에 우리는 수많은 생명의 스러짐과 시간의 덧없음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대자연이 침묵 속에서 소멸할 때, 즉 겨울이라는 소실점을 향해 스스로를 비우는 시간 속에 머물게 될 것이다. 흔히 ‘가을을 탄다’고 말하는 것은 이 과정의 축척된 경험에 따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의 면면을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가을이 반드시 상실의 계절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상수리나무와 참나무가 있는 숲에서는 이들 나무의 열매로 다람쥐와 청설모가 몸에 영양을 비축하고 기나긴 겨울잠을 청한다. 사시사철 푸름을 유지하는 침엽수가 자연에 되돌리는 혜택이고 생태계에 대한 기여이겠지만, 물론 자연의 일부인 우리 인간도 이 혜택을 나누어 가지곤 한다. 돌아가신 장모님께서는 서울의 구의동에 사셨다. 해마다 가을이면 인근의 어린이대공원에서 땅에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묵을 쑤는 것이 장모님에게는 큰 소일거리였다. 물론 어린이대공원이 서울시 소유이므로 장모님의 행동이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겠지만 문제로 삼는 사람도 없어 해마다 장모님께서 직접 쑤신 찰진 도토리묵을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활엽수가 광합성을 멈추고 잎을 떨구기 직전에 우리에게 선물하는 만추(晩秋)의 서정은 봄꽃이 만개한 풍경과는 다른 자연의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우리는 해마다 자연이 주는 축복을 만끽하며 내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가을은 상실의 계절이 아니라 소멸을 앞두고 자연이 한 판 벌이는 축제의 계절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파민이라는 뇌 호르몬이 있다. 즐거움을 유발하는 자극에 반응하여 분비되는 호르몬이라고 한다. 과다하게 분비가 되면 환각에 빠지거나 공격성이 증가하는 부작용이 있다. 마약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인 증상이다. 지나치게 사람을 쾌락으로 이끈다는 부정적인 면이 있지만 살면서 즐겁고 기쁜 감정에 작용하는 호르몬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이 임종을 앞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도파민의 분비가 증가한단다. 물론 생과 사의 접점에서 벌이는 사투가 환각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지만 별로 재미가 없는 사실 접근이라고 하겠다. 차라리 생애의 마지막 순간을 장식하는 축제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우리에게 죽음이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한 판 펼치는 축제는 얼마나 화려하고, 그 순간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울긋불긋 짙게 번지는 만추의 서정과 다르지 않다고 다소 앞서 나간 듯싶은 생각을 해 본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어놓고 소멸을 향해 가는 자연이 사람에게 보여주는 간절한 축수(祝手)에서 깨닫는 것은 ‘잃는 것이 있으면 얻는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의 일부가 스스로를 잃어가면서 또 다른 자연에게 자신을 내어놓고 내년을 기약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죽음을 이길 수는 없다. 자연의 모든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유한한 생명을 가진 존재이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생존법인 번식을 통해 유한한 생명이라는 한계를 극복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라지는 생명이 있다면 태어나는 생명이 있다. 그것이 자연이고, 우리는 자연의 일부인 것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는 것은 자연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적용할 수 있는 진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