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로한 부모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일 년에도 몇 차례씩 마음 졸일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리고 최소한 한 번은 대형 병원의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된다.
내 어머니가 그랬다. 중증의 뇌경색으로 쓰러져 스스로 화장실도 갈 수 없는 반신불구의 몸으로 7년을 재활병원에 계시다 88년 삶의 무게를 내려놓으셨던 어머니가 그랬다.
평생의 지병이었던 고혈압과 이로 인한 뇌경색으로 고통받으셨지만 원래 강건한 체질이었던 당신은 뇌경색으로 휠체어에 몸을 맡긴 채 언어 장애로 의사 전달에 어려움이 있어도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으시고 재활에 열심이셨다.
그러나 이렇게 불편한 몸 이외에는 비교적 건강하셨던 어머니께서도 돌아가시기 3년 전부터는 매년 봄이면 한 번씩 응급실 신세를 지게 되었다. 팔순을 반 이상 넘긴 고령의 나이는 어머니처럼 질병을 앓고 있지 않아도 내일을 장담하기 힘든 나이일 것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이맘때면 어머니에게 허락된 봄의 존재에 대하여 늘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몇 년을 더 사시다 어머니께서는 뜻하지 않게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돌이켜보면 투병의 과정은 어머니 만의 것이 아니라 곁에 있는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가족에게도, 본인에게도 인내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것은 병실에서의 임종 미사 후 어머니께서 하셨던 "이제 됐다."라는 말에서도 증명이 된다. 7년의 투병 생활이라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시간이었을 것이다.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에게 자신을 위한 임종 미사는 그 아슬한 경계를 넘어가는 것이었기에 이후 3일 동안을 평안을 유지하시다가 짧은 혼수상태를 거쳐 돌아가셨다. 자식으로서는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떠나셔서 무엇보다도 감사한 일이었다.
임종 미사 후 맑은 정신일 때 어머니와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에 어머니께서 "사랑해."라고...... 사랑한다는 말은 평소에도 병실에서 자주 했던 말이지만 언어 장애가 있었던 어머니께서는 그저 웃으시면서 "그래."라고 답했었는데 그 날에는 그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많이 애쓰신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내가 어머니에게 하고 싶었던 작별 인사는 "어머니께서 가장 힘들었던 시간을 옆에서 자식으로서 같이 할 수 있어서 행복했었다"는 것이었지만 내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 미처 그 말을 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어머니께서도 내 마음을 느꼈으리라 믿고 싶다.
어머니께서 하늘나라로 떠나신 지 2년이 지났다. 7년의 시간을 거의 매일 병실을 찾으면서 어머니와 함께 했었고, 은혜롭게 장례를 치렀기에 후회는 크게 남지 않았다. 그래도 매일을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
특히 요즘처럼 찬바람이 부는 계절이면 어머니에 대한 추억은 어머니께서 해주셨던 음식에 대한 기억이 함께 한다. 어머니의 장어탕은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최고의 맛이었다. 서울에서 간혹 장어탕을 먹을 때도 있지만 어머니 만의 양념과 방아 잎이 잔뜩 들어간 장어탕을 만날 수 없다. 그리고 겨울밤의 출출한 배를 채워주었던 고구마 빼데기 죽의 맛도 잊을 수가 없다.
어머니께서 곁을 떠나니 이들 음식도 다시는 맛볼 수 없는 것이 되어 추억으로만 떠올리게 되었다.
비단 음식뿐일까. 당신의 미소, 어릴 때 듣던 당신의 다듬이질 소리, 이른 아침 부엌에서 음식 하던 소리 등......
오늘처럼 찬바람이 부는 날이면 어머니의 모든 것이 그리움이 되어 머릿속을 대책 없이 마구 헤집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