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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과 꿈 Dec 20. 2022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 음악은 인생을 감싸고 흐른다(7)

프란츠 리스트의 ‘사랑의 꿈’ 중 제3곡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성탄을 앞둔 연말, 만감이 교차하는 때입니다.

 지난 한 해를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만족보다는 아쉬움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이는 몇 년 간 지구촌을 휩쓴 감염병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기 침체 등 주변 상황이 좋지 않았던 사실도 있겠지만, 언제나 연초에 계획했던 일들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지만 연말이면 아쉬운 결과를 받아 들게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한 해 동안 여러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거나 최선을 다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우리는 완전하지 못한 존재입니다.

 거시적으로 볼 때 우리가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저지른 과오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에 등장한 많은 이데올로기가 우리로 하여금 이상향을 꿈꾸게 했지만, 이상 사회는 단 한 번도 구현된 적이 없습니다.

 이상적인 사회를 그리는 거대 담론이 있어왔지만 언제나 불완전한 서사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서사는 우주의 종말과 우주에 깃든, 인간을 포함한 모든 개체의 죽음입니다.

 지금 팽창하고 있는 우주도 까마아득한 시간이 흐른 뒤에 운행을 멈추고, 공간과 시간이 소멸할 것으로 믿습니다.

 시작이 있으면 그침이 있고, 처음이 있으면 마지막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에서 깨우치기 때문입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은 우리 존재를 불완전한 것으로 인식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불안이 잠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우리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종교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내세를 내세워 죽음을 극복하고자 합니다.

 한편, 기독교는 부활 신앙이라는 독특한 교리로서 죽음 이후의 천국에 대한 약속뿐만 아니라 현세에서도 천국을 구현할 수 있다는 믿음을 선물했습니다.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과 중세인들은 곧 다가올 예수의 재림과 세상의 종말 후 부활을 기대하면서 고난과 고통스러운 현실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 종말론을 극단적으로 신봉하는 사이비를 제외하고서는 정통 기독교에서 종말론에 천착하지는 않습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런 이유로 현대 기독교는 초대교회가 지닌 신앙의 순수함과 간절함을 잃어버렸습니다만, 예수가 우리에게 준 새로운 율법, 즉 사랑이라는 최고의 가치에 매달려 신앙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love’라는 단어 대신에 ’luve’라는 조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연극이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해져서 그 가치가 퇴색한 세태를 비꼬는 내용의 연극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물론 남녀 간의 사랑이 소재였습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사랑의 가벼움도 문제이겠지만, 완전한 사랑을 꿈꾸는 것 또한 문제이겠습니다.

 생각하건대 완전한 사랑은 우리에게 가능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언제나 미완성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 작품에서 만나는 사랑 이야기에 감동을 받습니다.

 이졸데의 죽음으로 완성하는 사랑, 게츠비의 처절하지만 우울한 사랑, 히드클리프의 광적이고 뒤틀린 사랑 등.

 이들의 사랑이 정상적인 사랑은 아닐지라도 나름 자신의 사랑을 자신의 방식으로 완성하는 캐릭터의 전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그너의 악극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게츠비’, 그리고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에서 감동을 받게 됩니다.

 이들 허구의 인물들이 완성하는 뒤틀린 사랑에 열광하는 우리의 모습은 TV 드라마의 주인공이나 화려한 가수들의 모습에 자신을 동일시하는 ‘대상화’ 과정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할 이러한 양태는 그만큼 우리의 사랑이 불완전하다는 것의 반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면으로 이끌었던 이들의 사랑이 한결같이 뒤틀리고 비극적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순수한 사랑의 전형이라고 할 베르테르마저도 자살이라는 비극으로 자신의 사랑을 매조지하지 않았던가요?

 이 대목에서 저는 우리가 생각하는 남녀 간의 사랑 자체가 뒤틀려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사랑을 왜곡시키는 것은 집착이며, 그 이면에는 소유라는 욕구가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물론 무리 짐승들의 짝짓기에서 보듯 소유욕은 타고난 본능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정복국가 시대의 부계 혈통 전승에서 체득하여 내재화된, 후천적 본능에서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모계사회에서는 결혼이라는 제도가 달리 없이 태어난 아기의 양육은 공동체 공동의 책임이었습니다.

 물론 거대해진 현대사회가 그 시절로 되돌아갈리는 만무하지만, 요즘처럼 결혼이 어려운 일이 되거나 그 필요성이 퇴색하고 상황이 심화한다면 인류 사회는 또 다른 선택을 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너무 말이 장황했습니다만, 우리가 사랑하기가 힘든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은 사실인 듯해 보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일이 어렵다 보니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들을 많이 합니다.

 동서고금의 철학적 사유가 자아의 발견에 있지만, 자아라는 것이 쉽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타인을 이분법적으로 분리하고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자신을 진정 사랑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른 사람을 진정 사랑하는 것입니다.

 타인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타인을 사랑하는 능력의 원천이 바로 자신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그 대상이 있기에 사랑을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들어졌을 때 실패한 사랑은 자신을 견딜 수 없는 자학의 늪에 빠뜨릴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곧 잘 말합니다.

 제발 너 자신을 사랑하라고.

 그런데 자학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감정입니다.

 자학은 스스로에 대한 연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에게 연민의 마음을 가질 수 없는 사람은 타인에게도 연민을 마음을 가지지 못합니다.

 우리는 본래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알랭 드 보통은 말했습니다. “사랑의 요구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늘 갈망의 요구까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적절한 적용은 아닐 수도 있지만, 우리가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지 못할 것은 아니다 라는 의미로 이해해 보았습니다.

 이 또한 우리의 사랑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사람과의 사랑이 사랑에 대한 이상과 욕구의 모든 면을 충족시킬 수 없기 때문에 갈망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새로운 사랑을 꿈꾸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스럽게 싹트는 감정을 도덕적 가책으로 억제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사랑의 싹을 틔우는 것이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새로운 사랑에 집착을 자양분으로 공급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소유라는 욕구를 배제할 수 있다면 사랑의 감정을 얽맬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상상해 봅니다.

 집착이 우리의 사랑을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을까요?

 사랑으로 이 땅에 온 예수를 생각하며 해 보는 생각입니다.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https://youtu.be/FZ651tNXp0Y

리스트의 ‘사랑의 꿈’ 중 “사랑할 수 있는 한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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