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후배들의 부음을 듣게 된다. 그만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반증이다. 피차 늙어가는 마당에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나이순도 아닐 터, 이 또한 자연스러운 현상의 일부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타까운 마음에 가슴이 멍해지는 것까지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지는 못한다.
모르는 사이도 아닌, 나보다 젊은 친구들이 서둘러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에 대한 당연한 감정이겠지만 이들의 죽음이 지병에 의해 예정된 것이 아니라 돌연사라는 사실이 그들의 죽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다.
그들 모두가 다니던 직장에 젊음과 열정을 모두 쏟아내고 능력을 인정받아 속된 말로 출세라고 하는 명예를 얻게 된 중년이었다. 비교적 일찍 남부럽지 않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고 승승장구를 꿈꿀 즈음이었다. 고작 사십 대 후반, 많아도 오십 대 초반의 나이에 생각지도 못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이 년 전에 세상을 떠난 한 후배는 사십 대 후반의 나이에 잘 알려진 해운회사의 상무가 될 수 있었다. 요즘은 그 나이에 대기업의 임원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라서 놀라운 일도 아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아무나 그 자리에까지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할 때 그 사람들 모두가 남다른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저 우직하게 맡은 직무에 성심을 다하면서 사회적 성공에 삶의 가치를 좀 더 두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아니다. 문제가 있다면 이른바 사회적 성공을 위해 과도한 헌신을 요구하고 사회적 긴장을 야기하는 사회에 있다고 할 것이다.
해운이라고 하는 것이 선적 회물의 납기가 중요하지만 바다와 바다를 둘러싼 이해관계, 변화무쌍한 일기 등 예측하기 쉽지 않은 고려 사항이 있어 업무의 스트레스가 심한 분야라고 한다. 그 일을 감당하다가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후배의 삶이 안타까울 수밖에.
이틀 전에 또 다른 한 후배의 부음을 알게 되었다. 겨우 이름만 기억하는 사이이고, 장례까지 마친 뒤 전해진 소식이라 정확한 사인까지는 잘 모르지만 예고도 없이 찾아온 죽음이라니 앞서 언급한 후배와 비슷한 사정이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돌연사가 아니라도 사회생활에서 오는 지속적인 긴장은 암과 같은 병을 키운다. 암을 유발하는 가장 큰 요인으로 스트레스를 언급한다. 이 년 전에는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다니던 교회의 젊은 집사 한 사람이 사십 대의 나이에 혈액암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난 일도 있었다. 세상을 떠난 후배나 이 집사가 유달리 출세에 집착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었다. 모두 자신이 속한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한 결과라고 해도 결코 과한 말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삶의 비애가 여기에 있다. 돌연사가 되었든 병사가 되었든지 간에 아직은 이른 나이에 생명의 희생을 강요하는 사회는 결코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없다. 건강하지 않다는 것은 곧 병든 것이니 우리 사회는 정신적으로 병든 사회요 그 구성원인 우리의 정신 건강지수도 높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물질주의가 팽배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비애다. 이는 우리나라 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자본주의 문명이 쌓아 올린 물질이라는 바벨탑의 위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후배의 부음을 듣고 하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