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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에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

- 이수인 작곡의 가곡 '고향의 노래'

by 밤과 꿈

갑자기 기온이 급강하했다. 겨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몸이 미처 적응을 할 사이도 없었기에 체감하는 날씨는 겨울처럼 꽤나 쌀쌀하다. 추위에 대비할 채비가 갖추어지기도 전이라 묵은 옷가지를 찾아 손을 보는 등 몸과 마음이 함께 부산스럽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졌다고 해서 나는 쉽게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지 않는다. 조금은 미련스럽다고 생각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겪어야 할 긴 겨울을 고려할 때 서둘러 추위에 대한 적응력을 약화시키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최근의 추위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학력고사를 마치고 받은 점수에 맞춰 지원한 대학에서 면접을 보던 날 경험했던 1981년 겨울의 추위는 정말 지독했다. 추위에 콧물을 훌쩍일 때마다 반쯤은 얼어붙었던 콧물이 들락날락할 정도였다. 온 가족을 이끌고 북한에서 탈북, 귀순했던 김만철의 말마따나 따뜻한 남쪽 나라에서 줄곧 살았던 나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추위였다.


내 고향은 남쪽의 중소도시다. 그곳에서 태어나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살았다. 그곳은 매년 겨울이 되어도 제대로 된 눈 한 번을 경험하기 힘든 곳이다. 운이 좋으면 내리는 시늉을 하다 금방 그치고 마는 싸락눈을 한 차례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 곳에서도 길과 지붕을 뒤덮을 정도의 함박눈이 내린 적이 한 번 있었다. 아마도 내가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직전이었거나 적어도 이학년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눈을 보기 힘든 지방으로서는 기상이변에 해당할 만큼 큰 일이었겠지만 엄청 쌓인 눈에 신이 난 것은 내 또래의 아이들이었다. 튼튼하게 만든 썰매가 있을 리가 만무했던 우리들은 각자 집에서 쌀포대처럼 튼튼하다 싶은 것들을 가지고 나와 서로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가며 눈을 지쳤던 기억이 난다. 그날의 유희가 눈과 관련한 것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예전에는 동네마다 체육사라는 이름의 점포가 많았었다. 지금이야 운동 도구를 인터넷이나 대형 마트에서 편하게 구입할 수 있지만 인터넷은커녕 대형 마트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에 체육사의 기능적 역할이 컸다. 그 시절에 체육사는 운동 도구로 벌어들이는 수익보다는 각급 학교의 단체 운동복을 팔거나 명찰에 이름을 새겨주는 것이 수익이 더 컸으리라 생각된다. 그런데 고향의 한 체육사에는 그 도시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물건 하나가 쇼윈도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스케이트 신발이라는 물건으로 TV에서나 잡지에서 구경을 했을 뿐 실물은 처음 보았던 것이다. 한 번 제대로 내리지 않고 얼음도 수돗가의 살얼음 정도만 볼 수 있는 곳에서는 그야말로 생뚱맞은 물건이었다. 그렇다고 내 고향의 겨울이 전혀 춥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기온이 높다 하더라도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매서웠다.


따뜻한 남쪽나라일지라도 추위도, 겨울도 존재한다는 말이다. 다만 겨울의 분위기가 조금 다를 뿐이다. 아무래도 햇살을 볼 날이 타지방보다는 많아서 동네나 학교에서 양지를 찾아 햇살바라기를 하며 겨울을 나는 재미가 있었다.

날씨가 추워지니까 고향의 겨울이 생각난다.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은 곧 그리움 그 자체다. 물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녀올 수는 있다. 그러나 마음이 쉽게 고향을 향하지가 않는다. 누구나가 그렇지만 고향에 대한 기억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더군다나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데다가 서울 인근의 묘지공원에 모셨기 때문에 고향에 남은 연고가 별로 없다. 그냥 고향은 마음에 그리운 대상으로 남겨두는 것이 속이 편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오늘처럼 소소한 일상의 하나가 망각의 강을 건너 기억으로 되살아 나는 경우가 있다. 더불어 오늘 같은 날에는 마침 어울리게 이수인이 작곡한 가곡 '고향의 노래'가 생각난다.

'고향의 노래'뿐만 아니라 '내 맘의 강물', '별'과 같은 서정적인 가곡을 작곡한 이수인은 내 고향에 있는 한 여자고등학교에서 음악선생님으로 학생을 가르치고 있었다. 가곡 '고향의 노래'는 이수인이 KBS 어린이합창단을 지휘, 지도하기 위해(변변한 성인 합창단이 없던 시절에도 어린이 합창단이 있어 합창의 명맥을 유지했다) 교편생활을 접고 서울로 갈 때 같은 학교의 국어 선생님이었던 김재호가 이수인에게 이별의 마음으로 써 전달한 시에 이수인이 작곡한 노래다. 김동진이 작곡한 가곡 '가고파'와 함께 내 고향을 상징하는 노래다. 이에 더하여 고향 사람 이원수가 쓴 동시에 곡을 붙인 홍난파의 동요 '고향의 봄'도 있다.

"국화꽃 저버린 겨울 뜨락"이라는 가사는 내 고향이 전국 국화 생산량의 팔 할을 차지하는 화훼의 중심지이기에 공감이 갔지만 "고향길 눈 속에선"이라는 가사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 고향에서는 가사처럼 눈이 쌓일 만큼 내릴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우리의 보편적인 정서와 풍경으로 이해하면 될 걸 그렇게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https://youtu.be/6ZyXyqD38m8?si=kDXN9Cjqqs3n23Y3

아주 여성합창단이 부르는 가곡 '고향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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