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호의 단편소설 '깊고 푸른 밤'
최인호, 그리운 이름이다. 197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소설가로서 경제개발로 인해 팽배해진 물질사회에 대한 비판을 작품으로 형상화한 1970년대를 대표하는 소설가의 한 사람이었지만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의 인기로 상업적 대중소설을 쓴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예전에는 그의 소설을 의도적으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 최인호를 일컬어 그리운 이름이라고 언급한 이유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대표했던 뛰어난 소설가로서의 그의 면모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최인호의 대중적 인지도로 해서 그를 상업 작가로 오인하기 쉽지만 섬세하고 감성적인 문장을 구사한 순수문학 작가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그의 다재다능함이 활동 영역을 한정하지 않았을 따름이다. 소설가 최인호는 이미 고등학교 재학 중에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한 후 다시 조선일보의 신춘문예에 당선, 등단했을 만큼 일찍부터 문재가 뛰어났었다. 생전에 최인호가 전한 일화에 의하면 소설가가 장래 희망이었기에 수업 중에도 공부는 뒷전으로 글쓰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선생들도 그의 문학적 재능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의 딴짓을 묵인했었다고.
최인호의 소설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장편소설보다는 1970년대 초에 쓴 단편소설에 순수문학의 정수를 담아낸 수작이 많다.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사회적 병폐와 소외된 인간 군상을 그려낸 소설들이 그것으로 그중의 하나가 '깊고 푸른 밤'이라는 단편소설이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소설 '깊고 푸른 밤'은 1970년대 연예계를 강타한 대마초 파동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전직 가수 준호와 소설에서는 뚜렷한 이유를 밝히지 않은 분노에 가득 찬 '그'가 미국의 캘리포니아를 낡은 자동차로 여행하는 내용의 소설이다. 비교적 단순한 내용으로 분명한 것은 둘 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환멸을 가지고 먼 이국 땅으로 넘어왔다는 사실이다. 준호의 경우는 한국을 떠난 이유를 소설을 읽으면서 명확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러나 소설은 '그'에 대하여 유명한 소설가라는 사실과 강박에 시달리게 하는 신문 연재소설 때문에 분노하고 자신의 소설이 영화로 제작되어 상영되는 극장 앞에서 분노한다는 사실만 언급될 뿐이다. 1970년대의 산업화와 물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소설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한다면 작가인 '그'의 분노는 문학적 성과조차 상업적 잣대를 들이대는 현실에 대한 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담배보다도 중독성이 약하다는 대마초를 피웠다는 이유로 인생이 무너져 내린 준호는 억압된 사회 기조를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이 한국을 떠난 배경에는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사실 '그'와 준호는 한국에서의 답답한 현실에 대한 일탈을 꿈꾸며 미국행을 감행한 것이었다.
"지난가을 김포비행장을 떠날 때부터 마음속에는 절박한 분노와 자포자기적 울분이 용암처럼 끓어오르고 있었"던 '그'는 여행을 떠났다기보다는 "도망쳐 온 셈이었다."
불법체류자가 되어 미국에 눌러앉을 생각을 하던 준호가 마리화나에 취한 몽롱한 목소리로 "여기가 어디지. 여기가 어디일까, 형. 우리는 지금 어디에 앉아있지"라고 말하는 준호는 여전히 "조금이라도 마취되어 있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는 엄청난 고독"을 깨닫고 한국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러나 로스앤젤레스를 향한 그들의 여정은 목적도 없었던 그들의 여정을 이끌던 낡은 자동차가 수명을 다한 채 지명도 알 수 없고 인적도 드문 곳에서 고립되고 만다. 생사도 미래도 보장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처절하게 패배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의 분노는 참따랗게 재를 보이며 소멸되었"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한다고 다짐했다. 그는 너무 지쳐 있었으므로 그 누구에게든 위로받고 싶었다."
최인호의 단편소설 중 대표작을 하나 꼽으라면 '타인의 방'을 선택하겠다. 그럼에도 '깊고 푸른 밤'을 떠올리게 된 이유라면 소설 속의 '그'와 준호와 같이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너무 일찍 막다른 길을 경험하는 청춘이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평생을 일해도 자기 집 마련이 어려운 헌실 속에서 영끌 투자를 하고 빚에 허덕이는 청춘이나 일확천금 비슷한 수익에 솔깃, 캄보디아라는 낯선 나라에서 피해자 혹은 가해자로서 범죄에 연루되는 청춘들이 그들이다. 낯선 땅에 홀로 던져진 짐승의 심정으로 청춘의 때를 보내고 있는 그들의 사정이 소설 '깊고 푸른 밤'의 '그'나 준호와 똑같지는 않더라도 크게 다르지도 않을 듯싶다. 인생이란 여정의 막다른 길에 홀로 선 그들, 고독하겠지만 부디 절망하지는 말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