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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도 귀소본능(歸巢本能)이 있다

- 화가 박수근의 '귀로(歸路)'

by 밤과 꿈

귀소본능의 사전적 의미는 "동물이 자기 서식 장소나 둥지 혹은 태어난 장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경우, 다시 그곳으로 되돌아오는 성질"이다. 어려울 것 없지만 그 말이 그다지 인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차라리 철새들의 이동이나 연어와 송어, 그리고 꿀벌의 회귀성을 떠올릴 때 그 의미가 선명하다.

사실 동물들의 귀소본능은 여전히 미스터리하고도 신비로운 영역에서 머물고 있다. 물론 학문적 연구에 의해 그 비밀이 조금씩 밝혀지고 있기는 하다. 철새들의 장거리 이동은 태양이나 별의 운행을 읽어내는 능력에 있다거나 연어나 송어와 같은 회기성 어류의 경우 처음 산란되었던 곳, 즉 물의 정보를 성체가 되어서도 기억하고 찾아온다는 것 등의 연구가 그 본보기다. 그러나 이들 연구 결과는 추측의 영역에서 머물고 있을 뿐 동물들의 귀소본능에 대한 정확한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더하여 동물들의 귀소본능에는 기억도 작동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단다.

당연하다. 동물에게도 뇌가 있지 않은가. 회귀성을 지닌 동물들 만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귀소본능은 인간의 능력이 닿지 않는 영역이기는 하지만 영역에 기억이라는 요인이 있다면 까닭 없이 안심한다. 그 마음이 일종의 동질감이라면 우리에게도 귀소본능이라는 것이 있을까.

우리는 근원이나 근본을 중요시 여긴다. 그리고 사물이나 현상의 본바탕이 되는 근원이나 근본을 중심으로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마음의 근본을 고향으로 생각한다. 고향은 태어난 실체일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뿌리, 곧 본성이기도 한 것이다.


화가 박수근의 그림에는 화가가 직접 지어 붙인 것 같지는 않지만 '귀로'라는 제목의 그림이 여러 점 있다. 한결같이 박수근의 그림에서 흔히 접하는 나목(裸木)을 화면의 중심에 두고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배치한다. 그중에서 한 그림에는 머리에 짐을 짊어진 여인의 뒤를 댕기머리를 한 여자아이 둘이 따르고 있다. 이들은 모녀와 자매 사이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멀리 산 아래 마을을 이룬 집들이 자리하고 있다. 아마도 이들은 마을을 향해 돌아가는 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 중일 것이다. 여인은 마을보다 번화한 대처에서 온종일 노점(露店)을 펼쳤다가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일지도 모른다. 머지않아 이들의 집에서는 하루의 보람과 같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상상을 해 본다.

그림이 따뜻하다. 이는 박수근의 그림에서 공통적으로 받게 되는 인상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화가의 미술론이 그의 작품에 보편적인 정서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출간되었던(지금은 폐간된) 미술 전문 계간지의 화가 박수근에 대한 '순심(順心)의 기록자'라는 언급과 같이 화면은 부드러우면서 따뜻하고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도 이웃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정겨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박수근의 그림 '귀로'가 그의 그림이 지닌 따뜻하고 정겨운, 보편적인 정서에 더해 더욱 마음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를 나는 이 그림이 우리 마음에 각인된 고향, 근원에 대한 그리움을 환기시키고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이 그림의 배경은 1960년대를 살아온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 비록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쫓기듯 서두를 필요도 없이 여유롭고 따뜻했던 고향과 같았던 시절을.

나는 아직 그렇지 않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향수병을 앓듯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에 귀착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나도 언젠가는 그럴 때가 올지도 모른다. 객지에서 대학 생활을 하면서 방학이 되어 고향에 가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고향의 사람 전부를 알 리가 없었지만 사람 사이의 경계가 선명하지도 않았다. 비슷한 또래라면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에 이르기까지 한 번은 선후배로 인연이 닿을 가능성이 높았다. 고향이란 그런 곳이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에도 편안하고 따뜻하게 자신을 품어줄 수 있는 곳. 그래서 모두 고향을 그리워한다.

이것도 우리의 기억이 마음에 각인한 귀소본능이 아닐까. 우리의 마음은 그 뿌리가 되는 근원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박수근의 그림 '귀로'에서 고향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도 그림 속의 인물들처럼 마음에 난 길을 따라 몸은 멀리 있으나 마음만큼은 이미 고향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수근 作 '귀로'(하드보드에 유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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