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현종 시인의 시 '견딜 수 없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
정현종 시인의 시 '견딜 수 없네'의 전문이다. 이 시로 시인이 제1회 미당문학상을 수상하고 같은 이름의 시집을 출간했을 때부터 무척 좋아했던, 그리고 여전히 좋아하는 시다. 정현종 시인의 시에는 언어의 리듬이 살아 작동하고 있다. 내가 정현종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다. 시인의 시에서는 언어의 현란한 비유나 상징의 구사가 그다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의 시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시인 만의 내재된 리듬감이 시에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절정에 자리한 시 한 편을 꼽으라면 나는 선뜻 '견딜 수 없네'를 선택하겠다. 선택된 시어들이 각자 울림을 가지고 큰 파고의 리듬을 형성하고 있어 장관이다.
시집 '견딜 수 없네'가 처음 출간된 해가 2003년, 그 이전인 2001년에 출간된 '제1회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에서 이 시를 만났으니 그 인연이 이십여 년이 지난 셈이다. 그리고 소장하고 있던 이 시집의 초판본이 커피 얼룩 등으로 훼손, 아쉬움이 컸던 참에 문학과 지성사에서 복간된 판본까지 소장하고 있으니 이 시에 대한 내 애정이 크다 할 것이다.
이 시를 처음 마주했던 당시 세상은 밀레니엄을 맞이하는 환희가 채 가시지 않았었다. 그런 사회 분위기와는 달리 나는 형의 죽음과 형에 대한 보증 채무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마디로 견디기 힘든, 그러나 견뎌야만 했던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그때 마주한 시 '견딜 수 없네'의 감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그때의 고난도 아픔도 모두 지난 시간 속에 묻혔다. 따라서 이제 이 시를 대하는 감흥도 변할 수밖에 없다. 산다는 일에 아픔이 동반하기는 당연하지만 그 국면에 따라 강도나 날카로움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어느덧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날이 훨씬 많은 나이가 되었다. 살아온 날에 대한 아쉬움은 그다지 없다. 힘든 시간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행복을 더 많이 느끼고 살았다. 인생이 그런 것이다. 좋을 때와 나쁠 때가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시간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 그래서 흘러가는 세월이 야속하다. 그 시간의 흐름 속에 이별하는 인연도 늘어가서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들이 아프다.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우리를 아프게 한다. 그러나 어찌할까. 견디기가 어렵더라도 견뎌야 하는 것을. 지난 시간의 경험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게 한다. 그것이 인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