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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찌감치 마음에 봄을 들이다

- 겸재(謙齋) 정선의 '심화춘감도(尋花春酣圖)'

by 밤과 꿈

갑자기 기온이 내려갔다. 게다가 바람까지 동반한 추위는 체감온도를 더욱 떨어뜨려 우리를 겨울의 한가운데로 던져놓았다는 당혹스러운 기분에 빠지게 한다. 차갑게 부는 바람에 실려 한껏 자태를 뽐내던 가을 나뭇잎마저 맥없이 떨어져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실감 나게 한다. 도로를 뒤덮은 낙엽이 우리에게 무상(無常)함을 말하고 있다. 이처럼 겨울을 알리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또 한 해가 저문다는 상념을 떨칠 수가 없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한 해가 너무 짧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가을 낙엽이 무상하게 떨어지듯 가까이에서 사라지는 것들, 사람들을 생각하면 새로 한 해를 맞이한다는 사실이 감사하다. 해마다 한 해의 끝자락에 교회의 성가대에서 부르는 찬양이 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 정말 큰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기독교인이라면 모두 지나온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공감하고 은혜를 느끼게 하는 찬송가다.

젊었을 때는 겨울을 좋아했다. 앙상하고 메마른 모습대로 솔직한 겨울과 달리 가식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반감이 있었겠지만 끝을 내다보고 깨닫지 못하는 때의 치기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장년이 되면서 겨울보다는 봄이 좋다. 봄의 약동하는 생명력에 마음을 빼앗긴 까닭이다. 생명이 가진 힘에 이끌리어 마음이 설레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설렐 일이 있다면, 그리고 설렐 일이 많다면 그만큼 좋을 것이다. 언제나 첫사랑과 비슷한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그런 기분으로 느닷없는 추위를 견디며 다가올 봄을 기대한다.

그래도 겨울의 초입에서 느끼기에 봄은 멀기만 하다. 이때 추위는 우리의 몸을 움츠리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까지 허허하게 만든다. 찬바람이 막무가내로 마음까지 훑으며 관통하는 듯하다. 이럴 때 겨울을 견디는 방법치고는 조금 유치할지는 모르지만 상상 속의 공간으로 봄을 초대를 해 본다. 봄을 배경으로 한 그림이나 에세이, 소설이 있다면 도움이 된다. 반면, 사진이나 실사 영화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실 그대로의 이미지에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랬듯 꼬맹이 시절에 만화책을 많이 보았다. 다 본 만화책의 한 페이지를 펼쳐 놓고 그 지점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 혼자 만의 스토리를 전개하는 버릇이 내게 있었다. 말도 없이, 만화책의 페이지를 넘기지도 않고 뚫어져라 쳐다보는 내 모습에 "제가 뭐 하는 거야"라고 생각했던 가족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봄을 맞이하는 감흥을 잘 포착한 옛 그림으로 겸재 정선의 '심화춘감도'가 있다.

겸재는 중국의 화제나 화첩을 모방한 관념적인 그림이 아니라 우리 땅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조선조 후기에 앞서 시도한 선구적인 화가다. 그리고 겸재의 대표작이라면 사생(寫生)의 결과로 탄생한 '인왕제색도'나 '금강전도'와 같은 진경산수화를 꼽는데 이견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겸재가 도화서의 화원 출신이다 보니 그의 그림은 진경산수뿐만 아니라 관념산수화를 비롯, 화조영모화나 초충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을 남겼다.

'심화춘감도'는 소품으로 겸재의 대작이 지닌 스케일이나 작품적 성과와 비할 바는 아니지만 "꽃을 살펴 봄을 느낀다"는 그림의 제목처럼 봄을 맞이하는 감흥을 잘 포착한 수작이다. 길가에 피어난 봄꽃이 소담스럽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꽃의 군락보다는 가까이에 조촐하게 핀 꽃이 훨씬 예쁘고 소중하다. 이와 같이 화면의 중심인 꽃이 피어난 길과 미점준으로 그려진 산의 능선이 한 지점에서 만나 화면 구성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화면에 동적인 리듬감을 주어 약동하는 봄의 기운을 느끼게 된다. 그림 속의 노인은 꽃에만 취한 게 아니라 술도 취한 듯하다. 얼굴에 홍조가 감돌면서 술 호리병이 쓰러진 것으로 보아 호리병을 다 비우도록 술을 제법 마신 모양이다. 봄기운에 취했든지 술에 취했든지 간에 기분이 좋으면 그만이다. 땅바닥에 퍼질러 앉을 만큼 냉기는 가시고 봄이 가까이에 왔으니 봄기운에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고 이에 술까지 더한다면 금상첨화라, 나는 겸재의 이 그림을 보면서 일찌감치 봄을 마음에 들이기로 작정했다.


겸재 정선의 '심화춘감도'(종이에 수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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