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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다리는 그리움들

- 장석남의 시 '옛 노트에서'

by 밤과 꿈

그때 내 품에는

얼마나 많은 빛들이 있었던가

바람이 풀밭을 스치면

풀밭의 그 수런댐으로 나는

이 세계 바깥까지

얼마나 길게 투명한 개울을

만들 수 있었던가

물 위에 뜨던 그 많은 빛들,

좇아서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내려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리고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그때는 내 품에 또한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모서리들이

옹색하게 살았던가

지금은 앵두가 익을 무렵

그래 그 옆에서 숨죽일 무렵


장석남 시인의 시 '옛 노트에서' 전문이다. 장석남 시인을 언급할 때 시인에게는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수식이 곧잘 따라다닌다. 이와 관련, 장석남 시인의 작품 세계를 잘 설명한 글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문학과 지성사 한국문학선집'에 있어 그대로 옮겨 본다.

"장석남의 시들은 낭만주의적 정서에 바탕을 둔 전형적인 서정시의 세계를 펼쳐 보여준다. 그의 시 속에 담긴 풍경들은 시인의 눈에 비친 풍경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 그린 풍경이다."

이런 이유로 장석남 시인의 시가 펼쳐 보여주는 풍경에는 아득한 거리가 느껴진다. 그 거리감은 시의 풍경이 시인의 눈에 비친 풍경이 아니라 '시인의 마음이 그린 풍경'이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시인의 시가 담고 있는 풍경은 현실의 것이 아니라 심리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 있어서 풍경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그리움을 시인의 언어로 환기시키고 있다.


지난 시간의 기억이 쌓여 그리움을 낳는다. 따라서 그리움은 현재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흘러갔으나 잊히지 않는 시간의 풍경이다. 과거를 빛으로 채웠던 시간의 흔적들이 아프다. 시간의 아픔을 구역질하듯 게워내면서 살아온 세월,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두렵지 않을 무렵'이다. 저절로 잊히는 시간의 흔적이 아니라면 모든 흔적이 아프다. 그래서 망각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 시간을 잊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터, '긴 시간을 견디'고 아픔에서 자유로워질 즈음에도 무디어진 채 여전한 '그리움의 모서리'는 얼마나 씁쓸한가. 그 모서리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상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살아온 시간을 기억케 하는 그리움이 좋다. 아픈 상처도 내 삶을 구성하는 일부로서 소중한 국면이다. 그리움에 바늘에 찔리는 듯한 아픔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움이 있어 지난 시간이 아름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견디어 여기까지' 올 수 있었기에 나는 아픔까지도 아름다움으로 마음에 품게 된다. 나에게 주어진 여건을 볼 때, 살아온 날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지극히 짧지만, 나에게 허락된 시간 속에 그리움이라는 신묘한 붓이 있어 삶이 보다 다채롭게 채색되기를 원한다. 또한 살아갈 시간 동안 만나게 될 그리움이 궁금하다. 만남과 헤어짐이 교차하는 것이 인연이고 인생이지만, 그리고 인연의 스침 가운데 아픔도 그리움도 따르겠지만 그것이 인생인 것을 알기에 느꺼운 마음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리움들을 기대한다.




장석남 시인(19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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